<블루 재스민> 그리고 <우리도 사랑일까>
어제저녁, 퇴근 후 한달음에 씨네큐브로 달려가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캐롤(Carol, 2015)>을 만났다. 서로 첫 눈에 사랑에 빠졌으나 그 사랑을 향해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던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마지막 장면 그리고 블랙아웃, 그 어둠 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캐롤>의 엔딩은 해피엔딩이라 할 만하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소설은 더 분명한 해피엔딩을 담고 있단다. 그런데 이 해피엔딩은 무언가 기쁘면서도 슬프다.
사랑의 속성이 그런 것처럼.
바탕과 결은 다르지만 사랑으로 마음 한구석이 휑뎅그렁해지게 만드는 또 한편의 케이트 블란쳇 Cate Blanchett 주연의 영화가 있다. 우디 앨런 감독의 <블루 재스민 (Blue Jasmine, 2013)>. <캐롤>에서 보인 '케이트 블란쳇 Cate Blanchett이라는 우아함'의 끝, 이전의 우아함이 <블루 재스민>에 있다. <캐롤>의 우아함은 지속되지만 재스민의 그것은 우아해서 더 처연하다.
우리 삶이 춤이라면 그 저 출수 밖에
삶이 내 예상대로 흘러가 주면 고맙겠지만 인생은 참 그렇지 못하다. 내 삶은 축복받았다고 그래서 더없이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그런 고백은 말 그대로 축복이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많은 이들이 평화를 가장하고 그 안에 촘촘한 슬픔과 어그러짐을 견디며 살아간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당신의 삶은 안녕한가"
돈 걱정 없고 충족한 사랑을 받으며 세상이 어찌 돌아가건 내 삶엔 이상이 없을 거라 확신하며, 뭐 아픈 사람 없으니 되었다 싶은가.
어른(?)들이 말하길 평범하기도 힘든 세상이니, 제발 평범하게만 살라고 하더라. 대관절 평범한 삶은 대체 뭔가 싶기도 하다. 단 한 번의 삶, 남들 사는 것처럼 그리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무엇을 좇으면 살아가야 할지, 때때로 막막해서 나름 한참(?)을 달려온 삶을 멍하니 바라본다. 생업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이 생의 깊이와 길이를 어찌 엮어 가면 좋을까 싶어 지는 것이다.
세상의 반은 남자요. 세상의 반은 여자일 것인데, 여인들의 삶은, 우리 어머니들의 삶, 내 주변의 많은 여성들의 삶이 기대 이상으로 스펙터클!! 해서 놀란다. 그 숱한 여인네들이 그들의 시간을 견뎌낸 것이 너무도 대단하고 대견해서,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정말 그들처럼 그 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 남들의 부러움 따위는 바라지도 않건만 앞으로 그저 자족하며 평안하게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을지 별안간 불안해진다.
타인에 의해서 삶이 좌우되는 걸 누가 바랄까만은 대개 여인네들의 삶은 그들이 사랑하는 타인들에 의해서 어그러진다. 그 어그러짐을 어떻게든 견디고 붙잡아 내어 예까지 버텼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 견딤을 진행 중일 것이고 누군가는 이제 막 그 고비를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타고난 것들과 자신의 손으로 쌓아 올린 것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로 우리의 삶은 직조되어 나간다.
<블루 재스민(Blue Jasmine, 2013)>의 재스민 역시 그녀가 사랑하는(?) ‘그’에 의해 인생이 꼬인다. 그녀의 그는 그녀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지만 그가 원한 것과 그녀가 원한 것이 일치하지 않게 되는 시점에 이른다. 더 이상 그들의 사랑이 유지되지 못하게 된 순간에 그녀는 그를 사지로 몰아넣고 그녀의 삶 자체도 자멸하는 길에 들어선다. 그녀의 분노는 어찌 보면 정당하다. 사랑의 배신보다 더한 상처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영민하지 못한 그녀는 삶은 계속된다는 걸 채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생은 항상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의 잘못은 무엇일까. 잘난 척하며 자신의 잘난 삶을 살아온 것, 자신의 우수한 유전자를 기회가 닿는 대로 유용하게 쓴 것, 남편의 죄를 묵과한 것, 멍청하게 남편의 외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것, 자신이 살아온 삶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욕망. 새로운 삶을 위해 늘어놓은 거짓말들. 그 모든 것이 죄인가. 그것이 죄라기엔 세상은 더 사악하지 않던가.
그녀의 잘못은 대체 뭘까. 재밌게도 인생이 꼬이는 것은 대개 누구의 잘못도 아닐 때가 많다. 그녀의 남편의 외도야 천인공노의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죽음으로 그 죄를 씻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녀 역시 그녀 자신의 삶을 파괴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순간적인 실수와 타이밍이 어그러져 전혀 상상도 못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공교롭게 그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만들어 낸 건 나 자신일 경우가 많다.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그리스 비극을 좋아하는 우디 앨런은 마치 현대판 그리스 비극을 직조해 둔 것 같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장난에 재스민을 세워두고 그 깊은 우울함을 어찌 감당하는지 지켜보는 악랄한 작은 신 같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또 얼마나 우스운지. 평범한 미국 소녀 이름인 자넷이 싫어 개명한 재스민. 좋은 향기를 뿜으며 사랑받는 삶을 살던 재스민은 이제 자신의 욕망과는 별개로 우울한 자넷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동생 진저(ginger)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아는, 너무 잘 알아서 그게 슬픈 여인이다. 인삼이든 홍삼이든 그건 내가 아니야, 난 그저 일개 생강일 뿐이니 생강의 삶을 살아내면 그 뿐이라는 듯 그녀의 태도가 서글프다. 그녀의 별 볼 일 없지만 성질만 불같은 남자친구는 칠리(chili), 재스민의 실속 없는 전 남편 이름은 할(hollow?)이다. 이름대로 된다 하지 않던가. 우디 앨런의 작명 솜씨에 눈물이 난다. 남자들의 삶은 기껏 망가져봐야 지질하거나 머저리 같을 뿐인데 여인들의 삶은 어찌 이리도 비참해지는 것인지. 우디 앨런은 사람들의 속물적인 근성과 날 것의 비참함과 지질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재스민으로 분한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재스민 그 자체였다. 아마도 감독이 생각한 것 이상의 재스민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줬을 것이다. 젖은 머리로 벤치에 걸터앉아 텅 빈 눈으로 텅 빈 과거와 기대할 것 없는 미래를 들여다보는 듯한 마지막 장면을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녀의 잘못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문의 답을 위해 또 다른 불안한 여성을 만나야 한다.
사라 폴리의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2011)>의 마고도 행복하지 않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어딘가 모르게 슬프다. 하지만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뭐가 문제일까 싶은 그녀의 일상은 한 남자의 등장으로 파동이 인다. 5년 동안 함께 산 사랑하는 남편 ‘루’, 하지만 자기 방식대로만 사랑하는 것 같은 남편이 때때로 낯설다. 그래서 종종 외롭고 그 외로움은 채워지지 못한 채로 일상을 살아간다. 친절하고 속 깊어 보이는 마고에게 친척들은 허물없이 대하고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지만 정작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자기 속내를 털어놓을 수 가 없다. 평온한 일상이 따분하게 느껴지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관심 갖는 이 하나 없는 것 같아 외롭다. 상한 마음을 위로하는 것도 자신이고 남편의 상한 맘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도 마고 자신이다. 사실 그녀의 남편은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다. 다만 더 이상 밀고 당기는 연애의 줄타기를 하지 않으려고 결혼을 선택한 루는 외로워하는 마고를 이해할 수가 없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남편과 아이를 원하는 마고 사이의 갭도 점점 커져간다. 그와 그녀의 문제는 무얼까. 문제가 선명하지 않을수록 문제를 풀어내는 일은 더 어렵기만 하다.
그런 그녀의 삶에 자유로운 영혼의 ‘대니얼’이 나타난다. 그녀가 왜 불안한지,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 그는 그녀의 모든 게 궁금하다. 그녀에게 닿고 싶고 갖고 싶은 첫 만남의 설렘들이 그들을 감싼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듯,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그녀의 삶에 생긴 균열들을 그녀도, 그도, 그녀의 남편도 깨닫게 된다.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들, 이미 주었던 마음, 상처받은 영혼은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육체의 배신 정도가 아니라 영혼과 마음의 배신이니까. 그렇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 휑한 구멍은 새로운 사랑이라 한들 메울 수 없는 것이다. 일상은 다시 균열과 외로움을 낳으니 그때마다 휑함을 메워줄 사랑을 찾아 나설 수는 없다.
그녀 자신도 그녀의 선택이(그 선택 자체도 그녀가 한 것처럼 보이진 않지만, 어쨌든), 그녀가 처해진 환경이 그녀에게 어떠한 결과를 주었는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그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미 옳고 옳지 않고의 문제를 넘어, 좋고 나쁘고의 결과를 넘어 그들은 그저 살아간다. 마고의 친구이자 시누이가 마고에게 말했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이지만 진짜 멍청이는 너야,
인생의 모든 구멍을 다 메우고 살 수는 없는 거라고.
처음 극장에서 이 대사를 마주했을 땐 구멍을 메우지 않은 채 살아가는 걸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삶을 포기한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예민하고 철저하게 삶의 균열과 구멍들을 알아채고 서로 메워가며 사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보니 그녀의 말에 조금은 수긍이 갔다. 모든 균열과 구멍을 메워가며 살기엔 우리 자신들이 너무 부족하다. 일상의 평온함을 감사하며 파진 구멍들은 파진대로, 채워진 많은 단단한 흙들을 또 감사하며 삶이 굴러가도록 두는 것이다. 그때엔 정말이지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치열하게 구멍과 균열들에 민감하게 살아가지만 어느 부분은 그러려니 짐짓 넘기면서 살아가는 지혜도 배우게 된다.
어쨌든 그녀들은 그녀들의 삶을 산다. 우리는 또 우리의 삶을 산다. 삶이 서로 잘 포개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애초에 삶이란 포개어지는 게 아니라 나란한 거라서 약간의 외로움과 삶의 무료함은 적당히 감당하면서 사는 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평범한 삶’이구나 깨닫는다. 이 두 여인네의 삶을 보고 있자니 삶의 쓸쓸함과 무게가 더해져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지만 그저 자신의 삶을 살 뿐 다른 것은 없다.
TV 속에 사랑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청춘남녀의 별 것 아닌 연애 이야기를 특별한 것인 양 보며 설렘에 몸을 떤다. 현실의 사랑은 간 곳 없고 모니터를 보며 설레어한다. 마치 그런 감정들이 고대 유물인 것처럼, 설정된 극이 아니고서는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다는 듯이.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환상인가. 사랑하기도 힘든 현실이 마치 환상 같다.
연애를 하면서도 언제부턴가 사랑을 믿지 않게 되어버린 가여운 청춘들에게
결혼을 그저 견디고 사는 또 다른 가여운 청춘들에게
모든 구멍을 일일이 메울 수는 없지만 다른 땅들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나갈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 영화들을 한번 보시게들 하고 권하고 싶다. 그래서 몇 개의 구멍쯤은 넉넉히 넘기고도 남을 단단한 흙이 되도록 조금은 힘을 내 봐야겠다.
덧.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 2011)>의 O.S.T가 또 엄청나다.
특히 레너드 코헨이 부른 “Take This Waltz”는 눈물이 난달까. 꼭 들어 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