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플라워 (Broken Flowers, 2005)>의 빌 머레이
옛날부터 ‘영감(다른 말로 아저씨)’이 좋았다. 영감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었고 아직은 소년의 감성을 가진 어딘가 모르게 나른한 그런 아저씨가 좋았다. 다소 예의 있는 듯 보이나 실은 다 귀찮아서 적당히 선을 긋고 살아가는 그런 나이 든 남자. 그러니까 그는 ‘빌 머레이(Bill Murray)’다.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겠다며 여행 가방을 끌고 방에서 나온다. 그녀는 두 사람의 미래, 이를테면 결혼 같은 건 안중에 없는 남자와 실랑이하는 것에 지쳤다.(그렇다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형식은 아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마주 본다. 남자는 문고리를 꼭 붙잡고 배웅 아닌 배웅을 한다. 도대체 뭘 원하느냐고 서로에게 묻고는 곧 답 듣기를 그만둔다. 그는 문밖에 서서 그녀의 이름을 한번 불렀을 뿐, 어떤 액션도 없이 그 자리에 선채로 떠나는 차를 바라본다. 여인은 떠났고 문이 닫힌다. 그렇게 그는 그녀가 떠나기 전에 앉았던 소파에 돌아와 몸을 누인다. 그리고 아까 보다만 <돈 주앙>을 마저 본다. 눈의 초점이 흐리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지만 분명 무언가 달라져 버렸다.
짐 자무쉬의 2005년작 <브로큰 플라워>의 첫 시퀀스는 지극히 빌 머레이스러운, 아니 그냥 빌 머레이라는 이름이 가진 것이 그대로 담겼다. 하지만 이 남자를 그렇고 그런 못난 남자로, 사랑을 모르는 찌질이로 취급하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다.
다시 <브로큰 플라워>. 이제 막 여자 친구를 잃은 돈 존스톤(빌 머레이의 극 중 이름)에게 발신인 없는 핑크 핑크한 편지가 도착한다.(사실 그의 이별과 동시에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의 내용인즉 그의 옛 연인 중 하나가 그의 아들을 낳았고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으나 그 아들이 아빠가 궁금해 찾아 떠났으니 알고나 있으라는 것이다. 애초에 봉투를 뜯어보는 것도 귀찮았던(혹은 귀찮은 척하던) 그 he 대신, 탐정놀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동네 친구 윈스턴이 오지랖을 떨며 그를 부추긴다. 사실은 없을지도 모르는(누군가의 장난일지 알게 뭐란 말인가) 아들의 엄마를 찾아 오로지 한통의 편지에 기대어 길을 떠난다. 다 귀찮다더니 하나하나 시키는 대로 잘만 하는 것 역시 이 늙은 소년의 매력.
그렇게 길을 떠난 존스톤은 4명의 옛 연인을 만나 은근슬쩍 아들의 존재를 떠본다. 하룻밤 그 집에 묵기도 하고 현재의 남편의 견디기 힘든 눈빛을 바라보며 저녁식사를 하고, 급기야 얻어터지기도 하면서 핑크 핑크한 흔적(왜 핑크인지는 그냥 영화를 보면 안다)을 좇으나 의문만 남긴 채 별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에 밟히는 소년들이 마치 다 자신의 아들인 것만 같다. 그리고 두 번이나 마주친 소년을 자신의 아들로 추측하며 전혀 빌 머레이 같지 않은 호의를 베푼다.(이건 거의 오지랖이다) 남자는 젊은 소년에게 어색한 조언을 건네며 자신이 그의 아버지가 아니냐고 묻는다. 소년은 불안한 기색을 비치며 자리에서 도망간다. 그가 아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우연이었을지 모르는 그 만남은 그에게 너무나 복합적인 감상을 선사한다.
순간 자기 자신에게서 아버지다움을 찾으려 한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당혹스러움,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삶에 대한 의문, 자신 곁에 여전히 누구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감각, 이전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생각과 감각들의 습격
묘사하기도 어려운 이런 감정들의 범벅이 그를 집어삼킨다. 아들의 존재 유무와는 별개로, 현재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이 허망함과 쓸쓸함의 정체를 확인할 길이 없어, 이유를 알 길이 없어 그는 다시 초점을 잃고 어디 먼 곳,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바라본다.
그는 참 멋진 여자들을 사귀었다. 늘씬하고 예쁘다. 서로 그다지 닮은 구석은 없어 보이지만 각자의 개성을 지닌 이 여인네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녀들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역으로 아직 화가 나 있기도 하다. 그를 사랑했지만 그녀들은 외로웠고 결국에는 그를 떠났다. 영화의 첫 시퀀스가 말해주듯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이 남자에게 그녀들은 모두 지쳤다.
하지만 그 역시 언제나 혼자라 느꼈다.(나는 왜 그를 변호하는가) 뼛속 깊숙이 늘 소년의 피가 흐르는 이 남자는 섬세하고 자상해서 생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생의 외로움이 너무 크니, 타인의 외로움을 껴안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 선을 넘지 않기로, 자기 자신과 타협한다. 누구도 누구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결론. 하지만 괜찮다. 그것이 삶이라면 나는 받아들이겠다는 그의 태도는 상대를 근본적으로 외롭게 하는 재주가 된다.
평생을 이어온(50년생인 빌 머레이와 극 중의 존스톤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얼추 그들은 55세다) 그의 이런 철학은 소년과의 만남을 통해 통째로 흔들린다. 그것은 소년의 영향이라기보다 자기 자신과의 만남 때문이다. 현재의 자신과 자신의 숨겨진 욕망과의 만남. “곁”을 구하지 않는 삶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자신이 괜찮다고 여긴 삶의 방식이 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닐 수 도 있을 거라는 그 허망함을 그는 어쩌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는 그를 텅 빈 길에 세워두고 영화는 끝이 난다. 그의 태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라는 일관된 태도는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다가가려는 스스로의 시도마저 외면하는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멋진 여자들은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 내가 그렇듯이. 그가 사랑스러운 것은 세상 귀찮은 듯한 그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생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보기 드문 섬세함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기대. 좀 억지를 쓴다면 이렇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그 사랑을 좇아가는 일이 힘겨워서 그저 귀찮은 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연기는 오직 빌 머레이만이 가능하다(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이 드러나는 것이 한편으로 부끄럽지만(뭐랄까 억지스럽다, 좋아하기 위해 좋아한다는 느낌) 그는 언제나 그를 연기한다. 짐 자무시든, 웨스 앤더슨이든, 소피아 코폴라든, 누가 연출을 해도 빌 머레이는 빌 머레이이므로 만세!!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실제상황에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도망하라는 것. 당신은 그를 절대 구할 수 없다. 그저 그 섬세한 내면을 멀리서 지켜보고 그 섬세함을 칭송하자.
지금 당신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인가. 또는 누군가 당신의 곁을 지켜주었으면 하고 원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 적어도 존스톤처럼 시도조차 차단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완벽한 곁을 만나는 것을 우리는 해피엔딩이라고 배웠다. 아마도 배운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결론이 다 같을 수는 없다. 각자의 결론을 각자의 방식대로 지으면 된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가 그녀들에게 전할 꽃은 꺾였으나 그는 스스로 어쩌면 자신의 곁에 있어줄 누군가를 원한다는 사실을 조금은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엔딩은 처연했지만 이것은 일종의 해피엔딩이다. 그의 철학은 금이 갔고, 때문에 지금 그가 느끼는 시린 마음은 일찍이 겪어본 적 없는 것일 테지만 그 균열은 벽을 허물고 오래된 공간에 새로운 공기를 들이게 될 것이다.
영화의 처음과 나중에 흐르는 음악이 인상적인데, The Greenhornes의 ‘There Is An End’가 그것이다. 마지막 가사는 이렇다.
Spring brings the rain,
With winter comes pain,
Every season has an end.
There's an end,
There's an end,
There's an end,
There's an end,
There's an end.
아마도 그의 시린 마음에 봄이 올 것 같은 기분.
빌 머레이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