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철 사진집, <충돌과 반동(2002)>
지난 주말 연극을 보러 혜화동에 갔다. 한 달에 한번 매체에 연극 리뷰를 기고하는데, 그래서 매달 한 번은 대학로에 간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혜화역 3번 출구로 나와 학림다방으로 향했다. 지난 학기 수업 때 오래된 다방을 조사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학림다방을 알게 되었다. 1956년에 문을 열어 올해로 벌써 60돌이 된 학림에 이청준, 김승옥, 전혜린 등의 많은 작가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다방에 앉아 잡담하고 울고 웃었을 그들을 떠올리며 나도 같은 자리에서 커피를 마실 생각에 살짝 들떴다.
학림다방 아카이브 hakrim.pe.kr
학림다방 문을 밀고 들어가니 좁다란 복도와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한번 더 밀고 들어가면 아담한 복층의 다방이 있다. 애매한 시간이었는데도 다방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남은 자리 중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비엔나커피를 시켰다. 왠지 오래된 다방에서는 비엔나커피를 마셔야 할 것만 같다.(명동에 가면 '가무'라는 카페에 가는데, 거기도 60-70년대 명동이 젊은이들의 중심일 때부터 자리하던 다방이라 옛 정취가 남아있다)
커피를 시키고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아이폰의 충전을 부탁했다. 스마트폰이 사라지자 할 일이 사라진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잠시 덩그러니, 그리고 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뭔가 커피도 더디게 나오는 기분. 할 일이 없어지니 시선이 주변을 향한다. 2층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시킨 메뉴들에도 눈이 간다. 그러다 한편에 꽂혀있는 책들에 눈이 갔다. 책은 언뜻 보아도 오래되보였다. 책의 제목들을 찬찬히 보다가 몇 권을 집어 들었다. 90년대 출간된 중국기행 책, 노무현 대통령 에세지, 사진집 한 권을 테이블에 올려두니 곧 커피가 나왔다. 목차와 서문을 건성으로 읽고 있다가 마음을 사로잡는 글이 있었다. 이갑철 선생의 사진집 <충돌과 반동>의 출간을 축하하는 김용택 시인의 글이었는데, 처음엔 흘려 읽다가 어느새 집중해 읽기 시작했다.
이갑철 선생은 1959년생으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사진을 전공했다. 앙리 브레송을 흠모하며 사진을 찍던 시간을 보내다 앙리 브레송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며칠 지났다고 앙리 브레송이었는지 로버트 파카인지 헷갈린다 -_-;; 아마도 브레송이었던 것 같다 ㅋ) <충돌과 반동>은 그의 작업들을 처음으로 묶어 2002년 출간한 그의 첫 사진집이다. 제목이 정말 근사하다.
사진집은 그의 사진에 대한 김용택 시인의 축하의 글로 시작하는데, 시인의 말을 읽고서 그의 사진을 다시 보니 그의 사진이 좀 더 깊이 읽히는 기분이었다. 작가 자신보다 자신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시인이 있다는 건,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일까. 사진과 시인의 글 자체도 좋았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 정도로 이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김용택 시인의 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다음의 구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또렷한 형상이 드물다.
또렷한 형상이 없다는 것은 그가 빛을 무시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가 싸우고 싶은 것은 빛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리라.
일상의 그 어떤 순간을 영원히 살게 하고 싶은 이갑철의 치열한 작가 정신은,
그래서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진작가들과 전혀 다른 존재인 것이다.
작가에게 이보다 더한 칭찬이 있을까. 치열함과 그 치열함의 결과가 구별된 것임을 확언하는 시인의 말은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되더라. 이갑철 선생의 사진은 설명 그대로 또렷한 형상이 드물다. 형상이 있다 해도 형상이 크게 부각되어 어그러져 보이거나 너무 멀리에 있다. 사람들의 표정은 읽기 어렵게 흔들려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표정이 보인다. 검은 실루엣만으로 삶의 결과 숨이 느껴지는 사진. 어떤 사진들은 그 삶의 결이 굵고 숨이 차서, 두렵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김용택 시인의 글은 번역이 되어 원문과 나란히 실려있었다. 어떤 구문은 영어로 표현하니 한글의 오묘함과 시적인 표현들이 명쾌하게 정리되어 마음에 더 박히는 것 같아서, 영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as long as life goes on, we feel our life is very dirty, ugly and uncertain.
everyone thinks life should be simple and clear, but in reality, it is not like that at all.
beacause it goes towards death closer and closer.
인생은 우리의 바람과 다르게 단순하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다만 지저분하고 못나고 불확실하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 날마다 가까워지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다들 노오오오오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세상에, 노오오오오오력만으로도 해갈이 될 것 같지 않은 지금의 시대에 이갑철 선생의 사진은 그런 불확실을 불확실로 프레임에 담아 보여주고 있다. 김용택 시인의 글을 통해 이갑철 선생의 사진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것 같아 혼자 신나 했다.
덕분에 이갑철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져서 검색을 했는데, 곧 그의 개인전이 열린단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약 5년 정도 촬영한 사진들을 묶어 '타인의 땅'이라는 이름으로 인사동 나우 갤러리에서 열린다.(2016.3.16 - 3.30) 1958년 출간된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 사진집에 영감을 받아 열리게 되었다는데, 갤러리에 공개된 작가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58년에 출판된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개인적, 보편적 진실의 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더욱 또렷해졌고 이것이야말로 지금 해야 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이 시대에 살고, 보고, 느낀 것을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느끼는 객관적 시각이 아닌 나라는 개인의 주관적 시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 시대의 현상들, 정치, 경제, 문화, 내가 살아가는 주변의 현실들을 보도하거나 증언하지 않고 오직 나 자신의 느낌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나 내 작업 또한 <미국인들>이 그러했듯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한 시대의 보편적 진실이 ‘나’라는 매체를 통과하며 사진 속에 담길 것이라 확신했다.
나우 갤러리 이갑철 개인전 소개글 전문 http://gallery-now.com/new_html/02_upcoming.htm
글 말미에 이런 실현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며 '확신'이라는 워딩을 썼더라. '확신'이라는 단어를 대하니 뭔가 <충돌과 반동>에서 품은 작가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작가에게 자기 확신이란 지극히 필수적인 요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냥 수긍하기로. 그래도 나는 여전히 불확실성, 스스로에 대한 불확실성을 믿는 작품들에 더 마음이 가긴 한다. 그래서 늘 첫 작품들은 그런 숭고한 매력이 있다. 어쨌든 이번 개인전에 가서 그런 그의 확신을 확인하고 싶다.
첫 사진집, 첫 소설집.. 처음 마음을 묶어낸 첫 작품집들은 언제나 귀하다. 그 귀한 마음이 이어지거나 멋지게 갱신되는 것은 정말 더 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