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오늘의 포르노그래피>, 북노마드
알랭 바디우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좌파 철학자이자 모택동주의자이며 행동하는 철학자라 불린다. 북노마드에서 출판한 <알랭 바디우, 오늘의 포르노그래피(알래바디우 저, 강현주 역, 김상운 감수)>는 2013년 프랑스 라디오 채널인 프랑스 퀼트르가 개최한 철학 포럼에서 알랭 바디우가 "현재의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부록으로 <르몽드>에 실린 그의 글 "적기와 삼색기", 그의 철학에 대한 윤동희 교수의 글을 싣고 있다.
다음은 "현재의 이미지"에 대한 주관적 요약과 윤동희 교수의 소개글을 읽고 바디우의 철학이 유물론적이지 않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의심을 정리한 것이다.
비극은 진리가 과거에 있다고 말하며 권력의 우울을 보게 한다. 희극은 언제나 현재를 이야기하며 현존하는 권력을 무대에 올려 조롱을 끌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희극은 현재의 이미지들, 권력을 벌거벗기기에 적합한 도구다. 무대 위에서 '유곽'은 욕망에 붙여진 평균 가격 달린 이미지들이 사고 팔리는 시장으로 그 이미지들을 통해 권력의 감춰진 잔혹성이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유곽에서 스스로 벌거벗은 욕망이 된 경찰서장이나 그때까지 몰랐던 욕망을 가지고 유곽 문을 두드리는 혁명가나, 모두 이미지에 굴복하고 그 굴복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순환은 그 자체가 희극이자 비극이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난달까.
아무런 환상도 없는 욕망은 실존할 수 있는가. 인민, 자유, 혁명이라는 우리의 욕망이 추상적인 것이 될 때, 하늘에 못 박힌 기괴한 별자리처럼 형상화되고 현실세계와 분리되어 더 이상 만질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환상이 된다.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은 환상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환상적이면 환상적일수록 원래의 생명을, 의지를 잃게 된다. 시인들의 너무도 화려한 문체로 쓰인 시어가, 그 기호들의 시적 정서가 향수가 되고, 노래가 되어 그 이전의 본뜻은 파괴되고 그 화려함이 낳은 환상은 시인 자신들이 살리고자 한 실체를 죽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포르노그래피, 벌거벗은 권력은 실상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거짓된 이미지들로 그들 권력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벌거벗었다는 것을 감추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현재에 대한 상상적 회복', '이미지들에서 벗어난 정치적 진리의 가능성, 이미지에서 벗어난 예외적 시간이라는 정치적 경험', 방법론적 시간으로 분리 접속된 시간의 경험, 벌거벗은 권력의 상징물에 대한 이해다.
거짓된 이미지로, 이미지 없는 벌거벗은 권력을 감추고 있는 것, 우리를 파괴하는 맹렬하고 벌거벗은 권력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뒤집어쓰자마자 모두의 인정을 받고 심지어 사랑받게 된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동의하게 되는 주관적 동력은 시장민주주의라는 합의적이고 외설적인 이미지 아래서의 역량의 재개에 불과하다. 결국 모두에게 편안한 자본주의라는 공상 안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위험하고 급진적인 비판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다. 소모적인 이미지들과 벌거벗은 권력으로 이루어진 짝의 하수인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도 과도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중간계급은 소비하며 서로 접속되어 있다. 정보로 무장을 한 열성적인 소비자들은 자본주의가 그 개인에게 덜 독재적이고 더 합의 추구적인 권위를 그리고 더 규제된 부패를 제안하기만을 한다면, 이런 점들을 헤아리지도 못한 채 국가에 참여할 것이다. 민주주의적 물신이 없는 정치가 필요하다.
제멋대로 요약 마침. ㅋ 저자와 역자의 의도와 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알랭 바디우는 프랑스의 극좌파 지식인으로 행동하는 철학자라 불린다. 그는 진리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변증법적 방법으로 사물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부정의 범주가 필요하다고 본다.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존재가 예외와 위반을 통해서 사건과 변증법적인 관계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건이란 거대하고 불확정적인 변동, 인간 현실의 원천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철학을 '존재를 이루는 조건들이 서로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유물론은 종교적 믿음을 거부하고 물질의 존재를 유일한 원칙으로 간주하는 것인데, 수학은 그 매개로서 작동한다. 신이나 영혼의 초월적인 수직의 관계를 거부하고 순수한 내재성의 열린 공간이라는 수평의 관계를 따른다. 의미와 본질을 찾는 행위란 '찾는다'는 믿음이지 사물이나 사건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우리라는 각각의 존재의 자유를 중시한다. '존재'를 인정하나 그것을 무한한 다양성으로 보고 그 종착은 비움이라고 정의한다. 무한성 자체를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을 '논리'라고 정의하며 현상이란 복합된 다양성, 인지는 논리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질서란 논리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바디우의 유물론은 세계가 무한한 기계라는 것을 전제한다. 세계는 오직 '체계'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와 무기력을 뿜어내는 수동적인 체계가 아니라, 논리적 체계 안에서 물질성을 기반으로 행동하는 엄격한 유물론적 체계라고 설명한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우연과 예외적 사건을 희망이라 명명한다. 그는 이토록 낭만적인 유물론자다. ㅋ
사물의 법칙에 덧붙여진 가치, 실재의 본질과 신의 부재를 정의하며 그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 하지만 인간 존재를 설명할 어떤 것에 대해 부정하지는 또 않는다. 체계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어떤 빈 공간이 드러나는 놀라운 순간을 '사건'이라 한다. 체계는 대체로 이 '사건'을 억압한다. 사건은 결코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 아래 깊숙한 곳에 잠복해 있다가 예외와 우연을 통해 체계를 전복할 만한 매개가 된다. 그는 '충실성'으로 그 희망을 좀 더 구체화한다. 사건의 파괴적 결과들에 우리를 헌신하기로 결정한 것, 그리고 사건으로 인해 변화를 경험하고 사건의 주체가 되는 것, 창조적 인간이 되는 일, 이것은 곧 '혁명'이다.
그는 그의 이 논리적 언어에 '사랑'을 핵심 키워드로 사용한다. 그는 사랑을 행동의 차원으로, 함께 나눌 새로운 상황으로 인식한다. 진리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진리의 절차 속에서 자신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며, 사랑은 과정으로서 행동하고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진리이며, 이는 분명한 실체가 있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는 따로 <사랑예찬>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는데(읽지는 않았다), 사랑은 둘의 변화가 진행되는 최소한의 코뮤니즘이며 자신의 삶 속에서 불쑥 솟아난 타자와 더불어 삶을 재발명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체험이라 말한다.
유물론적 낭만이란 이런 것인가. 아니면 그는 실은 유물론자가 아닌 것인지 ㅋ 그가 유물론자라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진리를 단순한 정신적 재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진리를 통해 사랑이 실현된다고 믿는 것이다. 유물론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실체 있는 것으로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바디우의 설명을 보면 이것은 마치 저명하고 통찰 있는 노老 목사의 설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보이지 않는 것에 실체를 부여하고 이를 전하는 전도자 같이 느껴진다.
그는 인간 존재의 정수는 주체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는 유물론자 같다가도) 하지만 주체와 의식은 같지 않아서, 자아에 대한 모든 개념을 버릴 것을 주장한다. 주체는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 자아를 넘어설 때 인간은 주체가 되는 것이며 이것을 윤리라고 한다. 진정한 사건이 나를 열어준다는 믿음, 그리고 그 열린 길을 계속 걸어가겠다는 믿음과 약속, 나는 이런 낭만적인 유물론자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도무지 유물론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가도,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모든 유물론자는 어쩌면 모두 낭만주의자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실현 가능하지 않은, 실현 불가한 인민, 자유, 혁명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것부터 이미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실현하려는 낭만이지 않은가 싶어져서.
그는 철학의 임무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철학은 사건이 탄생하는 순간,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우연한 대안과 저항의 가능성과의 만남과 실현, 또 그것이 삶으로 전이되어 현실에서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타락과 일탈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동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삶을 강조한다.
윤동희 교수님의 알랭 바디우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글을 통해, 여기 또 한 명의 알랭 바디우 빠가 생기고 말았다. ㅋ 나는 뼛속까지 크리스천인데도, 바디우의 이 낭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