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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대항하지 말라

나홍진 감독의 <곡성> 그리고 정희진처럼 읽기

by 영롱
...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주기도문(마태복음 6장 9-13절) 중


출처 : daum 영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영화 <곡성>을 보고, 그 이후로 전부는 아니지만 몇 편의 흥미로운 리뷰도 읽었다. 정말 사람들은 놀랍고 대단하다, 사람들의 덕력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다. ㅋ


영화를 보는 내내 도대체 누가 진짜 악인지를 좇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악이 던졌다는 미끼는 무언지, 그것이 무엇이길래 다들 걸려드는 건지, 도대체 왜 그게 '나'이고, 나의 딸인지 말이다. 영화는 끝내 그 모든 것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아서, 몹시도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상영관을 나섰다.


악이 우리에게 던지는 미끼는 도대체 무얼까, 무엇이길래 우리는 그 미끼를 덥석 물고 삼키며 놓지 못한 것일까. 영화 속 대사중에 '그것은 의심이며 의심을 확신하고 죄로 옮긴 것'이라 말했지만 뭔가 충분하지 않다. 왜냐고 물으면 물을수록 찝찝함만 더해지던 차에, 최근에 읽은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본 악에 관한 글이 떠올라 그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다. <정희진처럼 읽기>는 여성학, 평화학 연구가 정희진 선생님이 쓴 서평을 묶어낸 책인데, 그 중 <신약성서> 편에서 작가가 언급한 악에 대한 해석은 우리에게 악이 던지는 미끼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녀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악에 대한 투쟁을 멈추자는 것은 아니므로, 주의 ㅋ)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 뿐이다. 악은 의도가 없고 다만 의지가 있을 뿐이다. 왜그랬니 라고 묻는다면, 그냥 그러고 싶었는데, 마침 그럴 수 있어서 그랬을 뿐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니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 5:40) 악과 싸우는 것은 반악일 뿐, 선이 아니다. 진짜 악은 악의 피해가 지나간 후에도 악의 지배를 지속시키는 장치이다. 악이 만든 공간에 살면서 악을 평생의 주제로 삼게 하는 것, 악의 이유를 물으면서 당하는 것을 넘어 사로잡혀 영원히 피해자가 되어 자아를 파괴하는 것이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출처 : daum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누가 악인지를 가려내느라 오로지 악에 집중했다. 누굴 믿어야 할지, 의심하고 의심한다, 그러다 누구도 믿지 못해서 발만 동동 구른다. 주인공은 사건현장을 좇다 보니 악의 흔적에 기웃거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악에 기웃거리다 종국에 악과 마주한다. 한번 마주하게 된 악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먹이를 놓아주는 법이 없다. 미끼를 살랑살랑 흔드니 아비를 잘못둔 탓에 딸이 미끼를 문다. 악을 피하는 상책은 악의 근처에 기웃거리지 않는 것 뿐인 것 같다. 하지만 악이 이미 마을에 가득차서 피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악은 마치 관심종자 같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발악을 한다. 마을을 휘휘저으며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 갖기를 기다린다. 미끼에 걸린 이들은 이 악을 떨쳐버리려 다른 악들을 불러모으는 굿판을 벌인다. 극 중 천우희가 연기하는 '무명'은 이웃집 할매가 굿을 하다 죽었다고 말해주지만 주인공은 그 말을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향해갈 때, 악과 악과 짝한 패거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전히 누구를 믿어야 할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 밖에 앉은 관객도 그러할 진데 스크린 안에서 악과 마주한 이들은 말해 무엇하랴.


악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예방책이라면 이미 마주쳤을 때 마을을 구할 유일한 방법은 여전히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극중 천우희가 연기한 '무명'은 그가 상징하는 것이 선이든지, 산신이든지 어쨌든 악에 대항하는 기운임을 극의 말미에는 유추가 가능하다. 선의 기운이 작동하는 것은 그것을 믿는 믿음이다. '무명'은 닭이 세번 울때까지 가지 말 것을, 자신을 믿어줄 것을 간구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고 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려한다. 과연 '무명'의 말을 들었다고 그들 자신의 집에 악이, 죽음이 닥치지 않았을까, 그 가정이 행복한 결말을 맞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의 목숨,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악이 그 다음 타겟을 정하고 온 마을을 삼키는 것을 막았을지모른다. 그 믿음을 통해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게 될 터이니 말이다.


악도 선도 그것을 믿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살길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음의 대상을 정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니, 제대로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렵구나 싶다. 주인공의 딸을 연기한 아역배우(김환희)가 연기를 하고 겪었을 트라우마가 상당했을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연기한 것일까. 감독의 편집과 화면의 밝기, 사운드의 크기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객석에 앉아서 스크린을 빤히, 깊숙이 들여다보게 하더라. 불명확하고 불확실한 무언가가 그속에 있는 것처럼 관객은 현혹된다. 한번 더 보기가 겁나지만 한번 더 보고 싶기도 한 영화.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무명'의 역할과 개연성이 더 많이 드러났으면 하는 것, 무명을 스크린으로 더 보고싶다. ㅜ ㅋ 아, 아무래도 감독판이 나오면 한번 더 봐야겠다.


출처 :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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