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가기록연구원 아카이브 시민학교 2016 여름학기 리뷰
올 여름 한국국가기록연구원에서 이영남 선생님을 모시고 아감벤을 함께 읽는 수업이 있었다. 일전에 기억발전소에서 진행한 '불타는 기록의 밤'에서 이영남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당시에 많은 자극을 받았었다. 이번 아카이브 시민학교도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일주일에 한번, 하루 두시간씩 총 4번의 수업이 진행되었다. 수업명은 '현대철학자와 아카이브'. 아카이브를 아감벤의 철학으로 읽어보는 수업이었는데, 예상대로 쉽지않았다. 한번도 거르지 않고 열심으로 들었지만 이해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서 하나의 질문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가치는 기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가치는 기록될 수 있나’라는 질문은 다소 거창해보인다. ‘가치’라는 용어도 그러하고, ‘기록’이라는 용어도 그러하다. 용어가 갖는 무게와 경계를 정의하고 인식하는 정도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이 질문을 시작으로 수업을 통해 이해한 부분들을 내 업무의 터전과 연결하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1.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어있던 그 무수한 포스트잇 메모들은 기록인가 기록이 아닌가. 같은 울분과 공감, 슬픔과 추모의 포스트잇이 갖는 함의와 가치에 대해서 다수가 공감할 것같다. 그 감정의 기록은 현재 우리사회의 '여성혐오'라는 단면을 기록한다.(희생자의 죽음의 이유가 여성혐오인 것에 동의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실제적으로 볼 때, 이 포스트잇 묶음들은 종이조각들에 불과하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현재 우리 사회를 말해주는 기록물로 포착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가치를 논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다행히 이 기록들은 잘 정리되어 책으로 출간되었다.
책 바로가기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95347049
2. 아카이브라는 용어는 요새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단어다. 아카이브는 ‘기록을 보관하는 장소이자 그 장소에 보관된 기록 자체’를 의미한다. 때문에 '기록' 자체가 아카이브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공공기관의 기록물을 관리하기 위하여 2000년에 관련 법률이 제정되었고, 2007년, 2012년에 개정을 거쳐 현재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란 이름이 되었다. 이 법률을 통해 공공기관에서 생산하는 많은 공문서들과 공공업무에 관련한 추진과정과 결과들이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질문 할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 수많은 공문서들이 우리 공공기록의 전부인가
‘공공’이라는 용어가 갖는 진짜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정의해야 하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록의 가치는 크게 설명책임성과 증거적 가치가 한 축, 역사, 문화적 가치를 한 축으로 둔다. 이상의 업무추진의 결과들로 우리 사회의 역사, 문화적 가치를 남기는 것은 가능한가, 공공기관의 기록물만으로 그 가치를 담기에 충분할지 질문해야 한다. 이상의 기록물은 공공기관의 설명책임성, 법률적 증거의 자료, 그리고 업무효율 등의 역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이 우리의 공공기록물의 전부라고 하기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행정의 기록이 공공의 기록은 아니기 때문이다.
3. 그렇다고해서 모든 기록을 공공기관이 관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법률의 통제하에 있는 공공기록물 외에 많은 '공공'의 기록들이 이미 존재한다. 기록으로 남아야 할 것들에 대하여 각 분야의 다양한 조직들, 많은 활동가들은 그 분야의 이슈들과 관련한 문제의식과 활동, 투쟁의 기록들을 남겨왔다. 그것들은 일부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아 사업화되기도 하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4•3평화재단과 기념관 등도 그런 사례다.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의 구술기록들(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의 기록) 그리고 국외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피해의 증언들도 그러하다. 이런 기록들, 증언들은 인류의 고통과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할 역사를 말해준다. 행정의 기록 보다 오히려 이상의 기록들이 보다 더 '공공'의 기록인 것 같다.
4. '공공'의 기억을 말하는 이상의 민간 기록에 대해, 질문을 던진 철학자가 있다. 그는 이 기록들이 ’진짜‘ 기록인지를 '다시' 묻는다. 그 철학자의 이름은 아감벤. 그는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이라는 책을 통해 남아있는 자들의 증언이 이미 죽어버린 자들의 증언을 대체할 수 있는지, 그들의 증언만으로 우리는 당시의 고통을 겪었던 자들의 이야기를 모두 기록했다고 봐도 좋은지, 그것의 ‘오리지털리티’를 묻는다. 그 침묵의 행간, 그 담을 수 없는 여백이 기록될 수 있는지, 그것이 불가하다면 그 행간자체가 함께 기록되어야 하지 않을지를 묻는 것이다. 푸코와 궤를 같이 하지만 동시에 독자적인 철학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아감벤의 통찰은 놀라우면서 동시에 어려웠다.(이영남 선생님의 해설로 이정도라도 정리할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린다)
5.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본다. 가치는 기록할 수 있나. 가치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그리고 그 기록이 오리지널리티를 담기위해서는 어떤 ‘철학’이 필요할 것 같다. 그 가치에 적합한 철학,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그 기록이 기록으로서, 가치로서 기록되어야 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아감벤이라는 철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남아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없다면, 그 여백, 행간, 침묵의 기록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다시 또 질문. 그럼 우리가 어떤 가치를 남기고자 할 때, 택해야 하는 철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택하는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가. 누가 주체가 되어 철학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기록을 포착해야 하는가.
6. 철학을 배우러 갔으니 철학 이야기를 하는게 당연하지만, 왠지 멀리에 있는,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진짜 현실의 문제, 지금 여기의 내 문제로 돌아와 보자. 나는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라는 기관에서 근무한다. 우리 기관은 자원봉사 활성화를 위해 전국에 있는 245개 자원봉사센터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악명높은? 1365포털을 운영지원하고 있다) 우리는 2013년부터 ‘자원봉사 아카이브’ 라는 사업을 기획하고 착수했다. 자원봉사 아카이브는 자원봉사의 가치와 역사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관련한 기록물을 수집, 관리하여 서비스하는 사업이다.(우리 기관을 중심으로 32개 기관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처음 아카이브를 설계할 때는 지금 보다 더 이해가 없었다. 하여 공공기록물 관리체계와 자원봉사 관련 지식을 공부하면서, 나름의 관리시스템과 웹서비스 체계를 갖추었다.
자원봉사 아카이브 바로가기 http://archives.v1365.or.kr/main.asp (12월 리뉴얼 오픈예정)
하지만 지금까지 운영해온 우리 아카이브를 돌아보니, 그 안에 자원봉사의 가치를 말해주는 콘텐츠가 어쩌면 한 개도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더라. 고백하건데, 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시스템 자체가 아카이브 일 수는 없다. 자원봉사자, 자원봉사를 하는 시민의 기록이라는 것은 자원봉사센터에서 만들어내는 공문서나 간행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닐텐데, 지금 우리 아카이브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담고 있는 아카이브인지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무엇을 담아내야, 무엇이 담겨야 자원봉사의 '가치'가 기록될 수 있을까. 뭔가 원점으로 돌아 온 기분.
7. 여기에 하나의 고민이 더 있다. 앞서 들었던 몇 가지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다수의 시민 기록들의 중심엔 고통이 있다. 진상규명, 문제해결, 그리고 반복하지 말아야 할 과오들의 기록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원봉사는 결이 다르다. 자원봉사의 정신과 가치의 중심엔 '기쁨'과 '공동체 의식'이 있다.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고통을 기록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일일 것 같다.(물론 자원봉사도 어떤 사회에서는 동원으로, 행정의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맥락이 드러나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8. 수업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온전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답을 찾기 위해,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원봉사 기록을 위한 당사자들, 자원봉사자, 자원봉사 관련 종사자들, 연구자들이 말하는 자원봉사의 가치와 철학이 무엇인지, 어떤 사회적 맥락 안에서 자원봉사가 작동하는지, 그 속의 기쁨과 아쉬움들은 무엇이었는지 합의하는 수많은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그 자리들을 통해 답을 얻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고민을 멈추지 말고 계속할 것, 또 기록의 여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함을 잊지 말 것. 이 글을 누군가 읽는다면 그 고민을 같이 하고 생각을 나누어준다면 고마울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자원봉사의 진짜 가치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