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생활감정의 재구성
일상 아카이브란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미세한 영역으로 범주화하여, 개인(집단)의 행위와 경험을 사회적 맥락에서 해석하고, 아래로 부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개인(집단)의 일상적 삶을 기록화하는 것은 물론 인문적 관점에서 기록을 수집, 평가, 선별하여 보존하는 조직 또는 이를 위한 시설, 장소'를 의미한다.
- 일상 아카이브의 발견(곽건홍, 2012) 중
일상 아카이브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논의를 통해 '아카이브란 무엇인가', ' 아카이브는 누구를 위해 존재 하는가'의 궁극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의는 언제나 어려운 법, 아래는 일상 아카이브 수업 때 진행한 지극히 사적인 프로젝트로서, 개인 감정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시도를 소개한 글이다. (karma 제4호 연구노트 기고)
알라이다 아스만은 《기억의 공간-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에서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를 인용하며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이다’라고 했다. 기록이 기억을 위해 존재한다고 전제할 때, 개인의 기록은 개인의 기억을 구성하는 도구이자 증거이며 기록의 구성에 따라 개인 삶은 다양한 해석을 가질 수 있다.
이하의 프로젝트는 명지대학교 일상 아카이브의 이론과 실제 수업과정의 일부로써, 한 개인의 고유한 기억을 기록으로 재구성하여 삶 속의 생활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가, 또 그 기록이 공동의 기억으로 동의 받고 공유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서 시작한 결과물이다.
일상 아카이브는 기억하고자 하는 일상의 모든 것을 기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반면 일상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서 공유되고 활용되기 위하여 누가,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남길지의 고민이 필요하다. 누가 무엇을 왜 기억하려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말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다면 수많은 철학자와 일상과 현상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근본적 해답 찾기를 조금 미뤄두고 아스만의 전제에 기대어, 개인이 자신의 삶을 기억하는 방식으로서 일상 아카이브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기억하고 싶은 나의 삶을 기록하는 최적의 주체는 ‘나’이므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의 감정(추억)을 기록으로 남겨보자는 것이다.
이 시도에 앞서 세운 몇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개체는 무수히 많으므로 주요한 생활주제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대상의 개성이 드러나는 기록물을 수집할 것, 기록개체 자체의 가치보다 읽히고 공유되는 맥락 가치를 목적으로 할 것이 그것이다. 개인의 기억이 공동의 기억으로 의미 있게 공유될 여지를 보다 넓게 확보하기 위해 핵심 수집대상 1명의 개인 기록과 그 개인과 친밀한 동연배의 지인들에게 동일 영역에 관한 질문을 던져 인터뷰하였다. 개인의 삶에서 시대와 환경, 시간의 흐름으로 발생한 생활세계의 격차, 다양한 인물들이 동일한 주제에 관해 갖는 생각과 감정들을 기록물을 통해 공동의 기억으로 남기고자 하였다.
두 가지 원칙하에 진행한 프로젝트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컬렉션명 : 30대 싱글여성 J의 즐거운 생활 : 불안과 만족의 경계에서
∙ 기획의도 : 30대 싱글여성 J의 생활기록을 통해 만족과 불안이라는 생활감정 전달하기, 20대와 30대의 생활기록을 동일주제로 병렬하여 차이를 발견하기
∙ 주체 : 30대 싱글여성 J이자 자기 자신
∙ 대상 : J의 생활기록(2030 생활을 상징하는 기록물 33건)과 동일세대 8인의 인터뷰 기록 6건(질문의 내용을 2030의 생활주제로 설정함)
∙ 기간 : 2002년부터 2015년 13년, J와 지인들의 20대부터 현재까지의 생활과 고민에 관한 인터뷰
※ 엄마의 일기장만 기록연도가 1982-2012이여 예외임
∙ 특징 : 개인의 사적인 생활영역을 기록한다는 것, 생산자가 기록의 주체가 된다는 것(기록물의 공개범위와 기술 수위에 영향을 미친다)
이상의 의도는 ‘개인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체험하는 만족과 불안의 감정들이 기록될 수 있는가’의 질문으로 구체화되었다. 30대 직장인 여성 “J(필자)”를 중심으로 그녀의 생활상의 만족과 불안을 담는 방법으로서 20대와 30대의 생활의 격차를 보여주되 생활세계를 일상, 경제, 취향, 관계의 4개의 영역으로 구분하여 해당 영역을 대표하는 상징적 개체들을 수집하였다. 개인의 기록만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J’ 주변의 동일한 연배의 인물 8인을 선정하여 4개 영역을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일상 아카이브의 수업모형은 다음과 같다.
전략수립 단계는 주제를 선정하고 이론조사를 진행하여 전략계획을 수립하는 단계다. 전략을 수립하면 실제적인 실행 실행계획을 수립하여 개체를 수집한다. 리드를 계발하고 라포 형성에 대한 계획도 여기에 포함한다. 실행을 통해 개체가 수집되면 기술설계단계로 넘어간다. 개체를 막상 수집하면 당초에 세운 기술방향과 꼭 일치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적절함을 판단하여 기술의 수준과 내용을 조정하고 아톰에 등록한다. 그리고 전 과정과 결과물을 최종 보고하고 공유하는 단계를 가진다. 활용에 있어서는 외부에 공개하거나 인터뷰에 참여해준 인터뷰이에게 공유하는 것 정도가 해당되겠다. 이번 수업은 경우 지난 7회 기록인대회 세션을 통해 내용을 공유하여 활용하였다.
수업모형에 따라 단계별로 구체적인 전략을 구성하였는데 생산, 수집, 분류, 기술, 활용 단계의 세부전략은 다음과 같이 수립했다.
생산전략은 ‘무엇이든 버리지마세요’ 전략과 생활패턴 분석을 통한 주제화 전략이다. 인생이 풍요로워지려면 소유를 간소화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내다버리라는데 그것만큼 수집에 해로운 것이 없다. J의 경우(그러니까 저의 경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습관이 이번 수집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10년간 모아둔 티켓 상자라던가, 연애편지 상자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엄마의 32년된 일기장도 그러하다. 또 하나의 전략은 주제화 전략인데 일상이라는 막연한 주제를 가족, 여행, 연애, 관람 등의 세부 주제로 쪼개서 수집 가능한 개체를 설계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수집전략은 생산전략과 연동된다, 이상의 주제화 전략을 반영하여 생활패턴을 주요 기능으로 보고, 인간관계도 분석하고 그 중 상징적 개체를 선택하여 수집하되 매체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공유와 열람의 지루함을 피하고자 하였다. 분류전략은 수집과 분류전략과 다시 연동된다, 개체들 간, 또 파트별로 비교가 가능하도록 동일영역에 반복적인 아이템을 배치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여지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기술(description)전략은 이용자 중심을 기본가치로 설정하였다. 기술시 J와 인터뷰이의 캐릭터 정보가 잘 전달되도록 시적 언어, 이를 테면 유희가 있는 단어를 활용하여 기술하도록 하였다. 또한 최소한의 기술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는 계층명에 기록 생산 주체에 대한 정보가 이미 다수 포함되어 있어 이용자의 열람 피로도를 줄이고자 하였다. 반면 인터뷰는 에피소드를 요약 하거나 주제별로 시점을 제공하여 관심주제를 들어볼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다. 녹취록을 붙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활용전략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아톰(AtoM) 등록을 통한 보존과 활용, 기록인대회 참여 등으로 정하여 실행했다.
아카이빙은 크게 20대 생활기록, 30대 생활기록, 친구들 생활기록의 3개의 파일(시리즈)로 구성하였다.
20대 생활기록은 ‘열정과 냉정, 그 푸르던 나날들’로 명명하고 당시의 건강함과 고민을 시적언어로 표현하였다. 30대 생활기록은 ‘골드 미스기엔 부족한 실버미스 아니면 그냥 미스(mistake)’로 정하고 실수 연발인 30대, 현재의 삶을 담고자 하였다. 20대와 30대의 생활기록은 모두 동일하게 일상, 경제, 취향, 관계의 4가지 파트(서브시리즈)로 구분하였다. 친구들의 생활기록은 ‘그녀의 친구들’로 명명하여 여성편과 남성편으로 구분하였다. 구분의 필요성 또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였는데, 성별을 구분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인터뷰의 내용상 주관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보여졌고 열람에 있어 구분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체 아이템 사례를 파트별로 살펴보자.
20대와 30대의 생활기록 중 ‘일상’ 파트를 보여주기 위한 아이템으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웹하면을 각각 포함하였다. 20대에 매일을 일상을 기록하던 싸이월드의 일기장과 회사 컴퓨터의 바탕화면을 비교하였다. 일상을 대표하는 주제로 신앙생활과 가족 등을 포함하여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소속 교회 어린이들의 캠프 사진과 32년된 엄마의 일기장 등을 포함하였다. 가족의 경우 ‘관계’파트에서 다루어도 무방하나 본 건의 경우 ‘일상’파트에 담았다.
‘경제’파트의 아이템 사례를 20대와 30대 생활기록으로 살펴보자. 20대 생활기록은 첫 아르바이트로 구입한 붉은 코트와 자원봉사활동확인서, 티켓박스 등으로 상징된다. 지속적인 경제활동이 없고 봉사활동을 하던 시기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첫 경제활동의 결과로 획득한 코트, 다양한 종류의 문화생활의 증거가 되며 동시에 용돈의 주요지출처인 10년이 넘게 모은 티켓 등을 개체로 수집하였다. 반면, 30대 생활기록은 자원봉사를 하던 20대와 다르게 자원봉사센터에서 재직하는 현재가 대비되도록 하였다. 카드명세서, 기부금 영수증, 경제적 불안을 보여주는 학자금융자 이자 문자 등을 포함하였다.
‘취향’ 파트의 아이템은 도서목록과 영화목록, 주요 취미활동 등을 20대와 30대별 개체를 볼 수 있다. 20대에 열광하던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의 도서들, 30대 서재를 채우고 있는 도서들 이를테면 <불안>, <부채인간>, <피로사회> 등 도서의 제목을 통해 30대의 무게와 피로도를 취향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다. 영화의 경우, 시기별로 가장 좋아했던 영화를 한편씩 설정하고 그 이유를 기술을 통해 드러내어 생활감정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20대는 성장영화인 벤 스틸러가 연출한<청춘스케치>, 20대의 고민과 젊음이 담겨있다. 30대의 영화로는 마이크 리 감독의 <세상의 모든 계절>을 통해 한 노처녀의 불안한 눈빛과 이를 바라보는 부부의 시선을 통해 현재에 느끼는 형언하기 어려운 불안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관계’ 파트는 연애와 우정이 주요한 주제가 된다. 20대 생활기록의 무게가 연애에 맞추어져 있다면 30대는 우정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개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다. 결혼하면 버리겠다고 쌓아둔(딱히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저 버리지 못해 방치된) 연애사진과 편지들이 담긴 상자가 20대 관계를 대변한다. 17살에 만나 17년을 함께해온 친구들과 십대때도 하지 않던 우정링과 친구의 결혼식에 모인 단체사진, 회사사람들과 매주 주간회의에 촬영하는 주간로그 사진모음을 30대의 관계의 생활기록으로 배치하였다.
J라는 개인의 생활기록만으로 2030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생활감정을 담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수집한 파일이 ‘J의 친구들’이다. 친구들의 생활기록은 각 파트 주제에 맞게 캐릭터에 맞는 질문을 구성하여 인터뷰한 녹음파일과 현장사진을 하나의 영상으로 묶어 제공하였다.(실은 아직도 작업중이다) 이 파트는 여성편과 남성편으로 나누어 분류하였고 그 이유는 충분하진 않지만 앞서 밝힌바와 같다. 인터뷰를 방법으로 택한 것은 스스로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기술에 있어 현재 상태 혹은 J와의 관계를 들어낸 명명과 이미 라포형성이 충분한 지인들에 꼭 맞는 맞춤형 질문을 던진 것이 특이점이다.여성편은 직장동료 H(여, 29세), L(여, 29세), O(여, 35세)를 집단 인터뷰하였다. 인터뷰가 처음인 세 사람이 수다를 떨며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려고 집단으로 진행하였다. O의 경우, 누군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었다. 나중에 그녀의 딸이 O와 같은 나이가 되면 이 녹음을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비신부 박사수료생 Y(여, 32세)와 5년간의 대기업 생활을 청산하고 스타트업한 E(여, 30)가 가진 남다른 불안과 계획 등을 담았다. 현재 Y는 결혼을 했고 E는 아직도 고군분투 중이다. 남성편은 결혼을 앞둔 헌신적인 사회복지사 P(남, 33세)와 비혼주의 여친을 둔 시민활동가 Z(남, 33세), 7년째 동거중인 직장인이자 자유기고가인 W(남, 35세)를 인터뷰 하였다. 각각의 형편과 특성에 맞는 질문, 그리고 인생철학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를 테면 보험에 반대하여 그런 태도를 삶에 반영하는 방식이라던지 신앙을 지키는 방법이라든지, 결혼하고 싶다는 세세한 이야기가 담겼다. P는 현재 이별하고 해외에 나가있고 Z와 W는 여전히 생활태도를 유지하며 시간을 이어가고 있다.
기획의도와 실제적인 결과가 얼마나 일치하는지 잘 전달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또 인터뷰 스킬의 한계, 일상 아카이브에 대한 개인적인 한계 등 기술적 부족이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의 생활기록을 정리하며 느낀 치유와 만족,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을 느낀다. 인터뷰이들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누군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점,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좀 더 자신에 대해 집중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며 타인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은 자신을 돌아본 것에 높은 만족도를 나타내었다. 반면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인터뷰 거절하거나 스케줄을 조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당초 16명이던 대상을 8명으로 축소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다른 장점으로는 인터뷰이를 지인들로 구성하여 콘텐츠의 깊이가 있다는 점 같은 맥락으로 꽤 밥값이 나간다는 단점도 있다.
생산자가 기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특징 중 하나인데, 기록물의 공개범위와 기술수위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 결함이 있다. 예를 들면 싸이월드 일기장을 목록만 보여주고 내용을 숨긴다거나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였지만 자연히 좋은 면만 보이려는 의도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결함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자신의 기억을 가장 잘 기록할 수 있는 주체 자체가 자기 자신임을 부인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스만의 언급을 다시 떠올려보라.
본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결함, 이론과 기술의 부족, 이용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도구로서의 일상 아카이브는 유의미하다. 개인의 기억을 기록으로 재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서 일상 아카이브는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역으로 일상 아카이브를 ‘기록하는 주체의 태도’를 기록하는 도구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아키비스트들이 자신의 생활기록을 모아두는 컬렉션을 상상해본다면 그것만으로 당대의 아키비스트들의 관점이 기록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해볼 수 있다.
여전히 고민하는 것은 기록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 블로그나 홈페이지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 혹은 필요한가의 고민도 아직 진행 중이다. 이번 시도를 통해 보다 지속적으로 다양하고 흥미로운 도전을 계속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