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롱 Mar 09. 2017

이 여자가 사는 법

로버트 요한슨 연출, 뮤지컬 <엘리자벳>


세상에 태어난 이라면 누구나 때가 되면 죽음과 만나기 마련이다. 여기 ‘죽음’을 의인화한 뮤지컬이 있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죽음’에게 사랑받다 결국엔 그와 마지막 춤을 나눈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의 일생을 다룬다.


뮤지컬은 황후 엘리자벳을 암살한 혐의로 100년 동안 못에 매달려 재판을 받고 있는 루케니의 변명으로 시작한다. 엘리자벳은 스스로 죽음을 원했고 죽음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는 변명. 그의 항변과 함께 무대는 그를 거들기라도 하듯 엘리자벳과 그녀의 삶에 개입한 많은 사람들을 불러내며 화려한 군무로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유복한 왕족가문에서 태어난 엘리자벳은 어린 시절, 문학을 즐기고 말 타기와 나무 타기를 즐기며 자유분방하게 자란다. 나무에서 떨어진 어느 날, 처음으로 ‘죽음’을 만난다. ‘죽음’은 순간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 곁을 맴돌며 그녀와 함께할 기회를 노린다. 혼인할 여인을 찾던 요제프 황제는 엘리자벳을 보자 첫눈에 반해 청혼한다.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엘리자벳에게 쏟아지는 규율과 강요는 그녀를 숨막히게 한다. 그녀를 길들이려는 시어머니 대공비 소피와의 마찰은 점점 더 그 골이 깊어진다. 남편 요제프도 갈등을 해결하기는 역부족이다. ‘죽음’은 그녀의 고통과 슬픔을 곁에서 지켜보며 숨죽인다. 자녀를 낳았으나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하는 슬픔, 급기야 첫 딸을 잃고 그녀는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내 삶의 주인은 나”라며 새롭게 살 것을 노래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부간의 갈등이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다. 타인에 의해서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엘리자벳은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여행을 택한다. 왕실을 떠나 유럽을 여행하며 철저히 자신의 ‘자유’에 집중한다. 아버지와의 정치적 대립으로 곤경에 빠진 아들 루돌프는 어머니 엘리자벳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왕실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던 그녀는 단호하게 아들의 부탁을 거절한다. 한 번도 어머니와 친밀한 관계를 가져본 적 없던 루돌프는 위기의 순간에 등을 돌린 어머니를 뒤로하고 ‘죽음’과 조우한다. 아들의 죽음 뒤 그녀는 눈물로 절규하며 아들에게 등을 돌린 것을 후회한다. 그 후로 다시는 왕실로 돌아가지 않는다. ‘죽음’과 다시 만나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소망이 된 날들이 이어지고 ‘죽음’은 그 곁을 지키다 ‘루케니’를 통해 결국 그녀를 손에 넣는다.


이 여인의 일생,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선택과 자유를 우선하였으나 끊임없이 공허와 쓸쓸함에 시달렸던 엘리자벳은 그녀 이면에 남아 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털어내려 애썼으나 ‘죽음’은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평생토록 자유를 찾아 다녔지만 온전히 자유하지 못하였고, 진정한 사랑을 원했으나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그녀의 비극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낳는다.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낳는 것은 어찌 이리도 쉬운가.



반복된 비극을 털어내지 못한 삶은 더욱더 내면 깊숙이 갇혀 그 비극을 곱씹으며 그것을 덮을 만한 도구를 찾게 마련이다. 엘리자벳은 미모를 가꾸는 일에 유달리 집착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는 그녀의 불안함을 더 선명하게 한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가장 사랑받은 황후로 기억되는 엘리자벳은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더욱 비극적이다. 독일 극작가 미하엘 쿤체의 발상, ‘죽음’을 의인화 하여 한 여인의 삶과 그 슬픔을 지켜보도록 한 그의 생각은 엘리자벳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가장 좋은 방법같다. 그녀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길이 죽음이기에 이 일생은 비극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이가 '죽음'이게 한 것은 탁월하다.




죽음만이 온전한 자유를 선사하는 길을 옹호하기는 어렵다. 죽음, 자살 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의미 탓이기도 하고 어려움과 우울은 너무도 쉽게 극복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관은 극복하고 성공해야 하며 그런 일생만이 축하받을 수 있다. 비극적 결말에는 냉소가 따른다. 어떻게 죽음을 도구로 삼는지, 그 나약함은 대개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타인의 비극과 각자의 삶이 주는 슬픔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삶의 굴곡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는 늘 중요하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삶에 대한 애정, 자유에 대한 의지를 자신의 방식으로 행한 끊임없는 투쟁의 결과여서 어느정도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나 공주다 ㅠ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감정이입하기 힘들었다는게 솔직한 심정, 노래는 좋았다!)


1992년 9월 비엔나에서 시작되어 2012년 국내에 초연한 이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뮤지컬 <엘리자벳>은 지루할 틈 없이 변화하는 무대, 유럽 왕실의 화려한 결혼식과 무도회, 대관식을 재현해 내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 2015년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로버트 요한슨 연출, 뮤지컬 <엘리자벳> 리뷰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속인 건 나의 욕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