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보름
지난 9월 제주에서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아이에게 물었다. "어디가 제일 좋았어?" 친구 말고 숙소 말고 킥보드 말고 아이가 제일이라며 고른 곳은 '헬로키티아일랜드'였다. 이왕이면 제주다운 오름이나 올레에 '제일'을 붙여줬으면 하는 마음은 엄마의 욕심이었다. 아이는 역시 아이였다. 그리고 난 그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다. 내가 보고 싶은 곳만 고집하지 않고 아이가 좋아할 곳을 먼저 찾았다. 아무리 여덟 살이래도 그녀는 어엿한 나의 길동무니까.
눈이 그쳐 너무 반가운 하루. 오늘의 첫 목적지는 '로봇스퀘어'다. 숙소에 머물고 간 사람들의 후기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로 아이가 너무 좋아해서 두 번을 방문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이디 역시 '로봇'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꼭 가고 싶은 곳 1번으로 이곳을 선택했다. '해맞이해안로 1032'의 주소에서 알 수 있듯 해안가에 위치해 내 마음에도 들었다. 게다가 2층에 맛있는 피자가게가 있어 관광과 식사를 이동 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점도 뚜벅이 여행객에게는 매력이었다.
2016년에 개관을 했다고 들었는데 외관이 낡아 보여 관리에 소홀한 곳은 아닐까 의심이 생겼다. 로봇 몇 개가 가져다 둔 것이 전부라서 하이디가 실망하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도 났다. 다음 장소는 내 만족이 더 큰 곳이라 이곳에서 하이디가 충분히 즐거워야 하는데 걱정이 됐다. 일단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바다 내음을 내 안에 가득 채웠다. 안의 상황이 생각보다 나쁘면 나라도 로봇이 되어 하이디를 즐겁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목적지에서 반드시 내 욕구를 충족시키겠다는 의지였다. 걱정은 어리석게도 늘 앞서간다. 사람들의 후기가 다 거짓일 리 없을 터. 문을 열고 들어서니 겉과 속은 달랐다.
악기를 연주하는 로봇부터 하이디의 눈길을 사로잡더니 손으로 볼을 만지면 부끄럽다 고개 돌리는 볼 빨간 사춘기 로봇 앞에서 하이디는 발길을 멈췄다. 로봇의 볼이 하이디의 손길에 닳겠다고 생각될 만큼 볼을 만지고 또 만졌다. 반복되는 행동에 웃음이 사라질 법도 한데 같은 포인트에서 어김없이 웃음은 터졌다. 오픈 시간 무렵에 도착해서인지 사람도 없어 하이디는 만지고 싶은 만큼 로봇의 볼을 만지고 웃고 싶은 만큼 웃을 수 있었다. 이곳은 그저 그런 로봇 박물관이 아니었다. 로봇에 대한 아이들의 환상을 채워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닌 직접 만져보고 조정하며 로봇 세계를 탐험할 수 있었다.
그림을 색칠하면 내 그림이 화면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자동차 로봇으로 레이싱도 하고 로봇 고양이와 장난감으로 놀아주고 로봇끼리 권투 경기를 내가 직접 조정하고 내가 움직이면 로봇이 따라 움직이는 체험도 했다. 젊은 직원들이 중간중간 많이 있었는데 모두 친절했고 적극적으로 체험을 도와주었다. 물고기를 색칠하고 핸드폰을 통해 보면 물고기가 현실 공간에서 움직이는 AR 체험에서도 하이디는 한 번에 만족하지 못했다. 모든 물고기를 다 움직이게 해주려는 듯 직원에게 반복해서 보여 달라 요청을 했다. 옆에서 보는 나도 슬슬 짜증이 나던데 직원은 전혀 짜증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색을 칠하면 더 잘 보일 거고 이렇게 보면 더 재미있을 거라며 아이의 즐거움을 확대시켜주었다. 저절로 고맙다는 인사가 나왔다.
신기하고 다양한 체험의 마지막에는 로봇 댄스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신나는 음악과 번쩍번쩍 화려한 로봇들의 댄스에 발은 박자를 타며 가만있지 못했고 어깨도 들썩였다. 옆에서 하이디도 고개를 쭉 빼고 까닥까닥하며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힐끔 옆을 쳐다보니 진행 직원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매시간마다 진행되는 공연이 지겨울 법도 하겠다 생각하려 했는데 가만 보니 동영상으로 공연을 촬영하는 중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직접 로봇을 만져보고 촬영할 수 있는 시간 동안 그 직원은 찍어둔 동영상을 보며 다른 직원과 함께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관을 처음 보고 가졌던 의심이 미안했다. 관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성실하게 관리되는 공간이었다. 직원들은 단순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로봇에 관심 있고 애정 있는 사람들이 로봇을 보다 친근하게 알리기 위해 마음을 다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공간에 관람객인 나 역시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둘러보고 만족할 하이디가 아니다. 2층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점심을 먹으며 눈에 바다를 충분히 담은 나는 하이디의 속도에 맞춰 재촉 없이 하이디를 기다려주었다. 다시 한번 돌아보면 쓱 지나쳤던 새로운 로봇에 관심을 가질 것 같지만 한 우물만 파는 하이디는 여전히 볼 빨간 사춘기 로봇 앞을 쉽게 떠나지 못했고 동작인식 로봇을 한참 동안 귀찮게 했다. 드디어 모든 체험을 끝낸 하이디가 말했다. "엄마, 이제 팔지 만들러 월정리 가자."
숙소를 떠나기 전 하이디에게 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하이디가 좋아하는 장소는 더욱 즐겁게 기대할 수 있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장소는 엄마가 가고 싶어 하는 이유를 듣고 스스로 그 이유를 받아들일 시간을 주는 거다. 로봇스퀘어 다음 목적지는 월정리였다. 바다에 가면 카페가 있고 카페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팔지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엄마는 바다를 오래 보고 싶으니 카페에서 하이디가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며 시간을 보내줬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했다. 다른 설명 다 잊고 팔지 만들기만 기억에 남겼지만 로봇스퀘어에서 체험을 하며 지쳤을 테니 카페에서 나를 기다려 주리라 하이디를 믿었다.
월정리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두 장소 모두 일주 도로에서 멀지 않아 15~20분 간격의 일주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걸어야 하는 시간은 카카오 맵 기준 7분. 카카오 맵에서 7분이면 하이디에게는 15분 남짓. 체험으로 지친 하이디가 15분을 즐겁게 걸어줄 리 없다. 이럴 때는 어김없이 놀이가 등장해야 한다. 끝말잇기의 고전적인 놀이부터 만화 캐릭터 역할놀이까지. 뭐 할까? 끝말잇기 할까? 보니하니 놀이(EBS 프로그램인 '보니하니'를 흉내 내는 놀이) 할래? 하이디에게 힘들다는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 작전이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도착한 곳은 월정리의 '숨비아일랜드' 카페다. 월정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2층 카페로 수작업 기념품도 팔고 있고 무엇보다 팔지 만들기와 양초 만들기 체험이 가능했다. 예쁜 구슬을 골라 팔지를 만드는 과정을 하이디 혼자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혼자 하기 좀 어렵더라도 도우미가 있어 하이디와 나는 각자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다. 작은 카페일 뿐인데 도우미가 있을 턱이 있나. 구슬을 하이디가 고르면 내가 줄에 끼워 넣었다. 팔지 만들기는 하이디의 체험이 아니라 하이디와 나의 체험이 됐다.
아침에 했던 엄마의 당부를 기억했던 것인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지 못한 엄마의 아쉬움을 하이디가 읽은 것인지 계속되는 체험으로 지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딸기 주스와 당근 케이크를 먹으며 하이디는 그림을 그렸다. 그동안 나는 내가 그토록 바랬던 커피 마시며 바다 멍하니 바라보기를 실천할 수 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바다. 에메랄드빛에서 점점 짙어지는 그 오묘한 색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 바다 때문이라도 제주는 와도 와도 또 오고 싶은 섬이 된다. 이 바다가 보고 싶어 그동안 마음이 그리 허전했던 모양이다. 눈도 좋다고 눈 오는 제주도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어수선했는데 이 바다 때문이었다.
커피를 다 마실 즈음이 되니 하이디가 슬슬 나가자고 졸랐다. 고요한 바다는 눈에 담았으니 이제는 귀와 코로 담고 몸으로 느낄 차례다. 생각보다 바람은 거셌다. 어제까지 펑펑 눈이 오던 제주였고 그 어디보다 바람이 센 제주 그것도 바다 앞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건 하이디가 감기에 걸릴지로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엄마의 걱정과 늘 달리 행동하는 아이. 바닷가 모래사장을 스케치북 삼아 화가가 됐다. 처음에는 가족 이름, 친구 이름 글씨를 쓰더니 다음에는 물고기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우고 그리고 다시 자리를 옮기고. 드 넓은 스케치북을 다 채우려는 것인지 화가 놀이는 멈추지를 않는다. 물고기 그림에는 이야기가 더해져 어느새 하이디는 나와 바다 탐험 놀이를 하고 있다. 물고기가 하나씩 모래사장에 늘어날 때마다 위기가 생기고 또 해결이 된다. 10분만 더 10분만 더가 몇 번이나 지났을까. 하이디가 그린 바다에 평화가 찾아오고 내일 또 다른 바다에서 모래 그림을 그리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도로에 설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여전히 에너지가 남은 하이디는 보니하니 놀이를 하자고 한다. 피곤하지 않느냐고 쉬면서 가자고 부탁해보지만 아직 에너지가 충분하다는 아이. 놀고 놀고 또 놀아도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인데 유치원과 집이라는 좁은 공간에만 가둬 두었던 것은 아닌지 답답한 서울이 감자기 미안해진다. 그래서 쉬고 싶다는 마음을 접고 보니하니가 된다. 사실 나 역시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에는 활기가 가득하니까. 지금 이곳은 놀고 놀고 또 놀기 위해 찾아온 제주이니까. "그래, 보니하니 하자. 행운의 여보세요 할 거야? 시시콜콜 데이 할 거야?" 오늘도 우리는 함께 즐겁다.
<여덟살 하이디의 일기>
일기설명: 오늘 로봇스퀘어 가서 1관에선 로비 2관에선 축구 3관에선 바다했다. 그중 3관이 재미있었다. 컬러링쇼 바다해서 재미있었다. 마음은 즐겁다. 로봇스퀘어 3관 가서 즐겁다.
1관 로비는 '볼 빨간 사춘기 로봇'과 '동작인식 체험'을 했던 공간을 말하고
2관 축구는 '인터렉티브 미디어 축구'로 바닥 화면에 보이는 축구공으로 축구 게임을 하는 거다.
3관 바다는 물고기를 색칠하고 핸드폰을 통해 보면 물고기가 현실 공간에서 움직이는 AR 체험을 말한다.
보니하니 놀이를 하며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하이디는 에너지가 넘쳤다.
올림픽 개막식까지 신나게 보고
정작 일기를 써야 하는 순간에 에너지가 바닥나버렸다.
무엇인가 강제로 하게 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아무리 놀고 놀고 또 놀기 위해 온 제주이지만
일기만큼은 엄마도 양보할 수가 없다.
계속 신나게 놀다 일기 쓰자는 말 한마디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에너지가 바닥났다고 하는
하이디의 말도 쉽게 믿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