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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童心)을 지켜주는 동화(同和)를 바라다

뚜벅이 엄마랑 제주보름

by 여유수집가

숙소 근처에는 두 군데 버스 정류장이 있다. 걸어서 2~3분 거리에 하나 15분 거리에 하나. 15분 거리에 있는 정류장에서 탈 수 있는 버스는 종점이 해녀박물관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거세게 부는 제주에서 하루 종일 밖을 떠도는 여행보다는 실내 관광지도 들릴 필요가 있었기에 해녀박물관으로 향했다. 처음 가는 길은 아니었다. 하이디가 여섯 살 여름 뜨거운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방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지만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실내 공간인 '어린이 해녀관'이 있어 두 번째 방문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두 살을 더 먹은 하이디라면 내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박물관을 돌아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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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부터 박물관을 향해 돌진하는 하이디를 보며 이번에도 느릿한 관람은 어렵겠구나 짐작을 했다. 작년 여름 회사에서 해녀와 관련된 방송을 제작하며 이곳을 내 기억에 꼼꼼히 남기지 못했음이 아쉬웠었다. 수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원고를 고치고 또 고치고 영상 버전을 계속 업그레이드해가며 해녀에 대한 애정 역시 깊어졌었다. 아직 해녀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하이디에게 아쉬움을 채우고 애정을 확인하는 시간을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한번 와봤다고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 것을 기억해 빨리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여덟 살이었다. 두 살을 더 먹었어도 아이는 그냥 아이다.


이번 박물관행도 망했구나 한숨을 푹 내쉬며 어린이 해녀관 바닥에 앉았다. 트램펄린을 뛰고 볼풀장을 헤집고 다니는 하이디를 보고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너는 너대로 놀아라 나는 나대로 길을 찾을 테니. 놀이터 한편에 있는 책꽂이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왔을 때는 하이디를 시선에서 놓치지 않느라 유심히 보지 않았던 곳이었다. 대근육 발달이 느린 아이라 행여 넘어질까 부딪힐까 조마조마했던 여섯 살을 지나 이제는 다른 꼬마들이 겁내야 하는 제법 큰 여덟 살이 되니 엄마의 시선에도 자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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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해녀와 물할망' 책을 꺼냈다. 해녀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지만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에 사는 외로운 물할망이 해녀들과 함께 놀고 싶어 해녀가 되고자 하는 이야기였다. 물에서 갓 나온 해녀들은 새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한 숨비소리를 뽑아내는데 물할망을 해녀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고 꼬마 해녀에게 이 비밀을 배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물할망에게는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물숨구슬이 있어 비밀을 푸는 것은 쉽지 않았다. 꼬마 해녀가 전복을 캐다 해파리에 쏘여 목숨이 위험해진 순간 물할망은 자신의 물숨구슬을 꼬마 해녀에게 주었고 마침내 숨비소리를 내게 되는 내용이었다.


해녀에 대한 방송을 제작하며 나는 숨비소리를 바람보다 더 거친 소리로 바다 아래서 오래도록 참은 숨을 한 번에 물아 뱉으며 해녀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휘이' 소리에 절박함을 담고 싶어 숨비소리를 내뱉는 할머니들의 표정이 더 일그러져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숨비소리는 그림책과 같이 새소리로 친구의 삶을 구하는 소리로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음을 알았다. 최선을 다하는 삶은 아름다우니 해녀의 삶을 알리는 소리 역시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 뒤늦게 후회했다. 하이디도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내게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호오이~'하고 표현되는 숨비소리를 따라 해본다. '휘이'하고 처연한 소리로 나타냈던 나의 의성어는 '호오이~'로 생동감을 갖는다. 하이디의 목소리로 듣는 '호오이~'는 더욱 살아있었다.


'어린이 해녀관'에 오기 전 박물관 관람 마지막 부근에서 막 설명을 끝내는 해설사를 만났다. 다른 설명은 다 듣지 못하고 마지막 질문만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숨을 쉬어야 살 수 있죠? 그런데 숨을 참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일까요?" 해설사 투어를 함께 했던 아이들 4~5명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하이디가 불쑥 대답을 했다. "해녀요." 들어오는 입구 영상에서 봤다고 한다. 바람같이 달려 다니며 박물관 전시물 모두를 다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숨을 참아야 사는 사람이 해녀라는 것과 그들의 숨비소리만 기억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한 번 오는 것보다는 두 번 오는 것이 더 좋다. 그 속도가 느릴지라도 분명히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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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세화해변 모래사장에 섰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그림을 그릴 거라며 기대하고 있는 하이디 때문이다. 어제의 바다탐험 2탄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늘은 문어부터 모래사장에 등장했다. 아기 문어가 엄마 문어를 찾아가는 길에 해파리가 등장해 공격을 한다. 아까 읽은 '꼬마 해녀와 물할망'에서 등장한 해파리란다. 이번에도 아기 문어를 구하는 것은 물할망이다. 그림은 어려워서 못 그리겠다며 자신이 물할망이 되어 해파리를 물리치는 흉내를 낸다. 엄마 문어였어도 괜찮았을 거라며 나는 입을 삐죽인다. 엄마의 삐침에 마음이 쓰였는지 하이디의 화가 놀이는 생각보다 빨리 막을 내렸다. 대신 카페에 가기 전 편의점을 들리자는 조건을 제시한다. 길거리에 즐비한 편의점이니 내 대답은 흔쾌히 OK다.


아직 작은 해변이기 때문일까. 예쁜 카페들에게 자리를 다 내어줬기 때문일까. 오일장이 서는 곳이라서 그럴까. 그 많던 편의점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거센 바닷바람에 볼은 빨개지고 하이디는 다리가 아프다고 점점 짜증을 낸다. 빨리 카페로 들어가고 싶어 달래는 것 대신 단호함을 택했다. 편의점에 가고 싶은 것은 하이디의 선택이니 업어주는 것도 안아주는 것도 쉬었다 가는 것도 없다고 했다. 선택했으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거라고 말했다. 꺾어주기를 바랐던 의지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쉬었다 가자는 말은 언제 나올까 라는 말로 바뀌었고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결국 바다 저 끝에서 편의점을 발견했다. 뭐 대단한 것을 살까 기다렸는데 가지고 온 것은 초코과자 한 봉지. 바람을 거스르며 20분 가까이 걸어왔는데 과자 한 봉지라니. 다른 것 하나를 더 사도 된다고 했지만 충분하다며 계산을 재촉한다. 아이의 소박한 마음이 부러웠다.



배제보단 배려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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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과자를 야금야금 먹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 미리 검색해둔 카페로 갔다. 초코과자의 달달함과 밀어주는 바람의 힘으로 같은 20분이 더 짧게 느껴졌다. 마당의 작은 오토바이가 손님을 반기는 인스타그램에서 핫한 카페였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조형물도 많고 카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볼 수 있고 집에 돌아갈 버스 정류장에서도 가까워 안성맞춤이었다. 운 좋게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나는 커피를 하이디는 핫초코를 마시며 추위를 녹였다. 그리고 각자 챙겨 온 책을 읽었다.


조용했던 카페가 소란스러워졌다. 5명의 아가씨 무리가 우리 뒤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우리 자리가 부럽다며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카페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여기 노키즈존(No Kids Zone) 아니야?" 카페 안의 유일한 아이,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하이디를 향하는 말이다. 그 옆에 아가씨가 답한다. "쟤는 조용하네."


아이라고 하면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는 시선을 느꼈다. 다행히 하이디는 책에 푹 빠져 시끄러운 소리에는 귀를 닫은 모양이다. 다섯 명의 아가씨들을 째려봤다. 지금 이 카페에서 가장 불편한 존재는 어린 하이디가 아니라 큰 목소리로 떠드는 5명 당신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이디의 엄마이기에 참았다. 몇몇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우리와 같은 평범한 다수가 도매금으로 부당함을 감내해야 하는 노키즈존. 이렇게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부모와 아이도 있다는 것을 말보다는 행동으로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 9월의 기억이 떠올랐다. 제주 한 달 여행에서 노키즈존을 방문했었다. 하이디와 함께 예쁜 카페라며 들어가려는데 노키즈존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하이디가 물었다. 왜 들어갈 수 없냐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아이라서 안된다는 말이 아이에게는 폭력이 될 테니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잘못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아이와 부모는 배제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노키즈라는 말은 아이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나라의 미래라고 말만 번지르하게 하면서 보살피고 보듬어야 할 아이들을 문젯거리로 취급하는 거다. 매몰차게 문 밖으로 내모는 배제보다는 배려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부모들은 아이에게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치려 애쓰는 배려, 손님들에게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려는 배려. 하이디가 살아갈 세상이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사회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욱 하이디가 그리고 아이들이 노키즈존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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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본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던 해녀박물관에서 하이디는 '숨을 참아야 사는' 해녀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기억에 남겼고 고생해서 도착한 편의점에서는 꼭 갖고 싶었던 물건 하나에 만족했으며 큰 목소리로 떠드는 어른들 사이에서 핫초코 맛을 음미하며 조용하게 머물렀다. 아이라고 무조건 어리게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어른보다 더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 어른과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인 아이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이 사회가 나와 함께 하이디를 건강하게 키워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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