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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다시 만나 더 좋은 제주

뚜벅이 엄마랑 제주보름

by 여유수집가

목요일 저녁 비행기로 제주에 도착한 우리는 토요일부터 대설경보발효 문자를 받았고 화요일까지 숙소에 갇혀 지내야 했다. 수요일 잠시 눈이 멈춘 틈을 타 차로 6분 거리의 함덕해변을 찾았지만 목요일 아침 다시 대설주의보발표 문자가 왔다. 로봇스퀘어에 들렀다 월정리해변을 가려던 계획은 마음에 헛바람만 불어넣은 채 공중을 떠돌았다. 제주 보름 여행에서 절반을 눈과 함께 보낸 거다. 이 정도 되면 눈도 염치가 없지 않을까. 내 한숨이 하늘에 닿은 탓인지 요가를 하며 애타는 원망은 비워낸 덕인지 점심 무렵 눈이 그쳤다.


"해 한 번 나면 되는데요." 어제 함덕해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택시에서 기사가 말했다. 아직도 눈이 쌓인 도로에 왜 제설을 하지 않나 모르겠다는 내 타박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말이 딱 맞았다. 요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발목까지 쌓였던 눈은 정오의 햇살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까만 아스팔트 바닥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팔트 바닥뿐일까. 썰매 타기를 위해 하얀 미끄럼틀로 변신했던 계단마저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썰매를 타겠다던 하이디의 계획도 실현 불가능해졌다.


마음이 급했다. 한 시간 간격의 버스가 집 앞 정류장에 도착할 시간이 다가왔다. 서둘러 가방을 싸고 옷을 입었다. 이제는 하이디 차례. "옷 입자." 일자 입술을 하고 나를 바라본 하이디는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외출 싫어. 안 할 거야." 단호한 하이디의 말에 내가 놀랐다. 버스에서 택시로 마음을 바꾸고 하이디를 달랬다. 썰매를 탈 수도 없고 다들 외출해서 같이 놀 친구도 없고 나가면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재미있는 것도 많고 과자도 하나 사자. 돌하르방이 된 모양이다. 하이디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조랑말카페(숙소 단지에 마련된 책이 갖춰진 실내 놀이 공간)에서 책을 읽으면 된단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기다리면 솔이 언니가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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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이는 눈에 갇혀 있는 동안 하이디와 함께 썰매를 타고 고드름 따기를 하고 책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종이접기를 같이 했던 두 살 많은 언니다. 아침을 먹고 마당으로 나가면 마당을 내다보고 있던 솔이가 밖으로 나왔고 점심을 먹으러 잠시 헤어질 때면 다시 만날 시간을 약속했다. 언니답게 솔이가 먼저 우리 집에 찾아와 하이디야 놀자를 외쳤고 하이디는 혼자서도 마당으로 언니를 찾아 나섰다. 하이디를 찾는 솔이의 목소리는 내게도 반가웠고 혼자 마당으로 나서는 하이디도 엉덩이 토닥거리며 환영했다. 야무지고 다정한 솔이랑 함께라면 하이디 걱정은 내려놓은 채 내게 혼자만의 시간이 허락된 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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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에게 솔이는 단지 일주일을 같이 보낸 언니만이 아니었다. 이미 한 달을 함께 해서 더없이 반갑고 정겨운 인연이었다. 작년 9월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같은 숙소 단지에서 솔이는 2년 살기를 하고 있었다. 제주 서편 곽지에서 시작된 인연이 동편 선흘까지 이어진 거다. 곽지에서도 솔이와 하이디는 킥보드를 함께 탔다. 솔이는 학교에 가야 했고 우리는 제주를 유랑해야 했기에 느지막한 오후에만 허락되는 만남은 늘 아쉬움을 남겼다. 제주 서편에서의 2년을 마치고 다시 육지로 돌아가기 전 동편에서의 한 달을 계획한 솔이를 다시 한번 만난 거다. 약속을 하지도 않았고 따로 연락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눈이 펑펑 오는 깜깜한 저녁 심심함에 지친 하이디와 조랑말카페로 갔다. 새로운 친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재미있는 책을 찾기 위함이었다. 딱 한 명의 아이가 빈백 소파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봐, 친구 있잖아." 하이디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아이는 솔이었다. 솔이니? 솔이 언니! 하이디? 놀란 목소리가 뒤섞였다. 예상하지 못했고 예상할 수 없었던 만남이었다. 제주로 오는 비행기에서 하이디는 말했었다. 솔이 언니 같은 언니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솔이 언니 같은 언니라고 바랐는데 진짜 솔이 언니를 만나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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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그치자 솔이는 바빠졌다. 2년의 제주 생활을 정리해야 하니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들러야 할 곳도 많아 더 이상 숙소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솔이의 외출은 당연했지만 하이디는 여전히 솔이를 기다렸다. 솔이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때뿐 내게 몇 번이고 솔이의 행방을 물었다. 자신이 외출했을 때 솔이 언니가 찾아올 수 있다며 집에만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영화 하나 더 보여주기로 하고 슈퍼가 보이면 과자를 사주기로 하고 나선 마을 산책에서도 30분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솔이 언니가 왔다가 그냥 가버렸을 것 같다며 울먹였다. 눈에 남아있는 새 발자국도 땅에 떨어진 한라봉도 솔이바라기의 발길을 붙잡기는 힘들었다.


월정리는 갈 수 있겠다는 미련도 가까운 함덕에라도 다시 가볼까 하는 아쉬움도 다 버리기로 했다. 하이디에게도 솔이 언니를 온전히 차지할 수 없음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눈물 그렁한 하이디를 보며 떠올렸다.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은 애쓴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반가웠고 며칠 동안 꼭 붙어 지냈기에 더 깊어진 인연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했다. "솔이 언니는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갔겠지? 친구랑 놀면서도 하이디를 생각할 거야. 전에 살았던 곽지에 놓고 온 물건을 가지러 갔을지도 몰라. 곽지는 여기서 머니까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아니면 로봇스퀘어를 아직도 가보지 못해서 갔을지도 몰라. 우리는 내일 가자."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오후 내내 나도 하이디와 함께 솔이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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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날 이후 하이디는 솔이와 스치며 인사를 하는 것 외에는 같이 놀 수 없었다. 하이디도 솔이의 바쁜 일정을 받아들이게 됐다. 솔이 언니도 외출했으니 자신도 외출을 하겠다며 흔쾌히 따라나섰다. 그렇다고 솔이를 기다리는 마음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솔이 언니와 같이 먹겠다며 사둔 초콜릿은 며칠 동안 냉장고에 그대로 있었다. 먹을까 말까를 망설이다가도 언니랑 먹겠다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솔이 대신 나와 나눠먹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쓰였다. 만남은 극적이었는데 이별은 허무할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다행히 초콜릿은 주인을 찾아갔다. 우리가 제주를 떠나기 전날 저녁 솔이는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찾아왔다. 하이디에게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참 좋은 동생이었다고 함께해서 즐거웠다고 쓰여 있었다.


제법 늦은 시간의 만남이었기에 솔이를 길게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편지를 받고 초콜릿을 나누 먹는 시간 정도가 두 아이에게 허락됐다. 솔이는 내게 12월에 제주도로 한 달 살기를 또 오면 안 되냐고 물었다. 자기는 올 거라며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를 꼭 끌어안은 솔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지키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 아무 대답 없이 더 꽉 끌어안아 주었다. 솔이의 등을 하이디도 끌어안았다. 언니가 돌아가자 편지를 읽고 또 읽던 하이디는 답장을 썼다. 언니를 사랑한다고 다시 만나자고. 그림도 그리고 스티커도 붙이며 정성스레 꾸민 편지를 다음날 솔이네 숙소 앞에 놓아두고 돌아서며 하이디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서울로 돌아온 후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았냐는 어른들의 질문에도 한결같이 솔이 언니를 이야기했다.


여행이 즐거운 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솔이와의 만남도 그렇다. 게다가 우리를 고립시켰던 눈은 솔이와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게 해줬다. 이별이 있으면 만남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음을. 편지로 이별이 더 따뜻해질 수 있음을. 곁에 좋은 벗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울 수 있임을 우리는 배웠다. 제주에서 열 살 솔이와의 만남을 통해 더 깊이 삶을 느꼈다. 그래서 더욱 제주가 좋고 여행이 좋다.




<여덟살 하이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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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설명: 오늘 집에 있었다. 솔이 언니가 없어서 울었다. 2번 울었다. 솔이 언니가 나가 서다. 또 보고 싶다. 마음은 슬프다. 솔이 언니가 없어서 마음이 슬프다.


솔이는 알았을까?

하이디가 애타게 솔이를 기다렸음을

2번이나 울면서 애타게 솔이를 그리워했음을


하이디는 깨달았을까?

여행지에서도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음을

여행지에서의 짧은 인연도 보고 싶고 그리울 수 있음을

그래서 스치듯 지나치는 여행지의 인연도 소중히 여겨야 함을

어쩌면 삶의 매 순간 맺어지는 인연이 모두 귀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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