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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리네 민박처럼

뚜벅이 엄마랑 제주보름

by 여유수집가

"팔랑팔랑 하얀 나비 같다."

밤 내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커튼을 걷기가 두려웠다. 다시 또 눈이면 어쩌나 겁이 났다. 불안한 예감은 쉬이 비켜가지 않는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아침이다. 하이디는 눈 내리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고 감탄을 한다. 다시 한번 숙소에 갇혀 있어야 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온다. 오늘은 꼭 보고 싶었던 바다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만 같다. 아쉬운 마음에 하이디에게 물었다. 눈 때문에 '로봇스퀘어'에 못 가겠는데 괜찮냐고. 엄마의 답답한 마음을 알리 없는 하이디는 쿨하다. 썰매 타면 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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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원망하며 숙소를 나섰다. 아침 요가 수업이 있는 날이다. 만사가 귀찮아져 갈까 말까를 망설였지만 하이디가 재촉한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 '싱'을 볼 것이기 때문에 혼자서도 잘 기다릴 수 있다며 의기양양이다. 활짝 웃는 아이의 얼굴이 얄밉기만 하다. 마음이 이리도 뻣뻣한데 몸은 또 얼마나 뻣뻣할지 다시 또 한숨이 나왔다.


이번 여행의 숙소에서는 주 2회 요가 수업이 있다. 보름을 머무는 동안 참석할 수 있는 횟수는 세 번. 수업 공고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항도 아니고 평소 요가를 즐겨했던 것도 아니었다. 휴직을 하고 생애 처음으로 꾸준하게 하고 있는 운동을 쉬고 싶지 않다는 마음, 느긋한 제주에 어울리는 힐링 방법이라는 생각, 아이와 분리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욕심, 민박 손님들과 함께 요가를 하던 이효리에 대한 동경이 뒤섞인 선택이었다.


세 번의 수업을 주저 없이 신청했지만 세 번을 다 채울 자신은 없었다. 정규 교육에서 체육 시간이 사라진 이후부터 세 달 전까지는 운동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다. 고작 세 달 운동이 이십 년 가까이 뻣뻣했던 몸을 유연하게 바꿨을 리가 없다. '흥'하면 어디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고요함과 밀착된 요가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은 많기에 한 달 남짓 요가를 배우기도 했었다. 내게는 맞지 않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지만. 뻣뻣해서 자세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꾸만 버티라는 선생님의 격려는 짜증이 됐다. 일상을 버티는 것도 힘든데 요가마저 버텨야 한다는 것에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20180202_114940.jpg 아이들의 도서관이자 실내 놀이터가 일주일에 딱 두 시간 엄마들을 위한 요가 공간으로 변신한다.

작은 매트 위에 천천히 앉았다. 아침부터 쏟아진 한숨 대신 내 몸 저 아래에서부터 끌어올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첫 수업시간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요가매트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다. 남을 의식하거나 경쟁하지 말고 자신에게로 마음을 모아 보라는 당부였다. 그 말은 부정적인 요가에 대한 내 인식에 균열을 가져왔다. 다른 사람들은 곧잘 하는 동작을 따라 하지 못해도 괜찮았고 통증이 심하면 해보라며 더 쉬운 동작을 권하는 선생님의 말에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있으되 나는 나의 속력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을 견뎠다. 잘하고 못하는 경계가 없어지니 당연히 버틸 필요도 없었다. 서울에서 배웠던 요가와는 달랐다. 나직한 목소리와 단단한 눈빛을 가진 선생님 때문인지 일을 쉬면서 내게 생긴 마음의 여유 때문인지 지금 이 곳이 제주이기 때문인지 이유를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요가매트에 가부좌를 트는 순간 오기 싫어 망설였던 마음을 사라져 버렸다.


어떤 동작이든 한 번에 휘리릭 이어가지 않았다. 천천히 단계를 밟아갔다. 아무리 낯선 동작도 조금씩 조금씩 몸에 익히는 과정을 거치면 완성 동작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다. 물론 한 번의 수업만으로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급함이 사라진다. 다이어트라는 결과를 달성해야 하고 체형 교정이라는 가시적 효과가 있어야만 하는 빨리빨리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느긋한 요가가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효리네를 찾은 민박객들도 제주에서의 요가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요가는 운동이기보다 마음의 평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이효리의 설명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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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내게 나이를 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많다며 나이에 비해 몸이 유연하다고 했다. 세 달 동안 꾸준히 했던 헬스의 결과라고 생각하려다 다른 결론을 내린다. 내 마음이 너그러워진 제주이기에 몸 또한 유연해진 거라고. 몸과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보았다. 팔랑팔랑 내리는 눈이 보였다. 하이디 말이 맞다. 정말 나비 같았다. 내리는 자유를 만끽하며 느긋하게 땅으로 떨어지는 눈이다. 다시 느린 시간을 느낀다. 바다를 봐야만 제주가 아니고 어디를 가야만 여행이 아니다. 그저 자연 속에 나를 맡긴다. 이 근사한 풍경의 일부가 되기로 한다. 뻣뻣하게 집을 나섰던 나는 유연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이만하면 효리네 민박보다 더 괜찮은 요가 클래스, 더 괜찮은 숙소 그리고 더 괜찮은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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