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보름
집을 둘러싼 검은 돌담만 아니라면 창가 앞에 핀 동백꽃만 아니라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강원도인지 제주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왔다. 41년 만의 폭설이란다. 그칠 듯 그칠 듯 그치지 않던 눈이 드디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일요일부터 사흘째 숙소에만 머물렀던 내가 눈이 멈춘 이 시간을 놓칠 리 없다. 하지만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상태. 가까운 함덕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2분 거리다. 가까운 정류장은 매력이지만 배차 간격이 너무 긴 것은 흠이다. 8시 50분에 버스 한 대가 있고 그다음은 11시 10분이다. 느긋하게 제주를 누리자고 했으면서 오랜만의 외출에 마음이 급해졌다. 일부러 더 천천히 준비했는데 10시 30분에 외출 준비가 끝나고 말았다. 겉옷만 입으면 되는 상태. 하이디가 빨리 나가자고 조를까 억지 이야기를 지어가며 시간을 끌어본다. 전날 집에서 본 영화, '몬스터 패밀리' 뒷 이야기다. 얼렁뚱땅 허술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아이의 마음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푹푹 빠지는 새하얀 눈길에 첫 발자국을 내며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인증샷 몇 장을 찍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차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춰 선다. 목적지를 묻더니 타라고 한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러 나선 마음 넉넉한 옆 집 주인 덕분에 우리의 여행길도 편해졌다.
첫 목적지인 만춘서점으로 가는 길. 하이디에게 오늘의 일정을 알려주었다. "서점에 갔다 바로 옆에 있는 피자와 파스타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딸기 케이크를 산 뒤 카페에 갔다 마트에서 장보고 버스 타고 집에 갈 거야." 어제저녁부터 피자를 먹고 싶다던 하이디는 엄마가 소개하는 일정을 마음에 들어했다. 카카오 맵을 활용 해 헤매지 않고 서점에 도착했고 단정한 건물 앞에서 친절한 여행객을 만나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도 남겼다. 여기까지는 참 근사한 여행이었다.
어린이 책이 없다는 정보를 듣고 방문했던 터라 독립서점만이 가진 개성을 느낄 시간을 벌기 위해 하이디에게는 곳곳에 붙어 있는 책 소개 메모를 읽어보라고 할 생각이었다. 직접 쓴 손글씨 메모에 관심을 보일 거라는 기대였다. 내가 알고 있던 정보가 잘못된 것. 어린이 책이 제법 있어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책을 고르기로 하고 신나는 마음으로 책 소개 메모를 세 개째 읽고 있는데 하이디가 나를 부른다. 벌써 보고 싶은 책을 골랐단다. 제대로 고른 것이 맞냐며 이 책도 저 책도 재미있어 보이는데 다 살펴본 것이 맞냐며 시간을 벌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엄마 책도 골라야 한다며 기다리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하이디는 혼자 문을 나서려고 했다. 6평의 작은 공간에서 소란을 피울 수도 없으니 아쉽지만 엄마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다. 유명 작가의 책, 요시모토 바나나의 '매일이, 여행'과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덥석 집어 계산대 앞에 섰다.
내가 잘 고른 것이 맞을까 더 마음을 끄는 책은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서점 주인이 하이디에게 말을 건다. "여행 왔니?". 힘찬 아이의 대답, "네". '네'라는 대답 대신 '살고 있어요', '살러 왔어요'라는 대답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 책에는 도장이 쾅 찍힌다. '만춘서점'. 제주에서 그 짧은 순간 내 손에 들어온 책의 운명을 결정하는 도장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놓친 것은 없나 이리저리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엄마를 두고 하이디는 엄마 책 말고 자신의 책에도 책갈피를 끼워 달라며 당당히 요구한다. 엄마 마음은 아랑곳없다. 자신만 챙기면 된다는 얄미운 모습에 슬슬 골이 나기 시작한다.
서점을 나서자마자 하이디는 피자 타령이다. 어서 피자를 먹으러 가잖다. 바로 옆 건물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다시 한번 깨끗한 하얀 눈길에 발자국을 낸다. 조금 이상하다. 다른 발자국이 없는 것도 입간판이 없는 것도 가게에 불이 꺼진 것도. 혹시나 하며 문을 힘차게 밀어 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난감하다. 고개를 돌리니 잔뜩 찌푸린 하이디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문 닫았어?" 재빨리 플랜 B를 머릿속에서 찾아보지만 세우지 않은 플랜 B가 짠하고 나타날 리 없다. 리조트에 가면 뭐라도 있겠지. 우뚝 선 대명리조트로 하이디를 이끈다.
평소 음식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아이. 다른 메뉴를 먹자고 부탁해보지만 오늘은 자기 멋대로 하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피자만 먹고 싶단다. 함덕의 다른 피자집을 검색하니 1시에 오픈이다. 지금은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이리저리 설득해보지만 완강하다. 그럼 계획을 변경해 딸기 케이크를 먼저 사자고 해본다. 리조트 후문에 있는 빵집이니 가기도 편하다. 싫단다. 그냥 리조트 로비에 있겠단다. 딸기 케이크는 분명 하이디가 먼저 사자고 했던 것인데 자기는 피자만 먹으러 갈 거란다. 만춘서점에서 이미 골난 엄마의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활화산처럼 들썩인다. 곧 불같이 소리를 지를 기세다. 로비에 있는 뽑기 기계 앞을 떠나지 못하는 하이디를 두고 혼자 빵집으로 향했다.
'지 비유 맞추느라 서점 구경도 다 못하고',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는 피자는 왜 오늘 꼭 먹어야 하는지', '내가 왜 맨날 지 비유를 맞춰야 하는지' 욱하고 생각이 솟을 때마다 빵을 하나씩 고르다 보니 양이 너무 많아졌다. 충동구매인가 싶어 몇 개를 도로 뺄까 하다 나만 좋아하는 당근케이크까지 챙겨 다 사버렸다. 충동구매면 어떠랴 나를 위해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여전히 하이디는 뽑기 기계 앞에 쪼그려 앉아 있다. 엄마 말 대로 어디 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며 유세다. 빵집에 갈 때만 해도 뽑기를 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아이를 어르고 달래 피자집까지 걸어가야 할 생각을 하니 당근이 필요해졌다. 지금 아이 컨디션으로는 10분 거리도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고만고만해 보이는 10개의 뽑기 종류 중 하나를 고르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결국 하이디는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인형을 손에 넣게 됐다. 이제는 엄마 말을 잘 듣고 짜증도 내지 않겠다며 시키지도 않은 약속을 한다.
하이디의 약속은 딱 5분 유효했다. 리조트 정문을 나서자마자 음악을 틀어달란다. 그래야 걸을 수 있을 것 같단다. 마음에 참을 인자를 세기며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어주었다. 노래 제목을 알려주며 지도를 보며 빵 봉투를 들고 아이 손도 잡아야 하는 엄마. 게다가 길치. 카카오 맵을 보면서도 길을 헤매 10분 거리가 20분이 됐고 가는 내내 아이는 언제 도착해를 물었다. 드디어 피자집에 도착. 이제 아이는 언제 피자가 나오냐며 묻기 시작한다. 그놈의 피자. 콩하고 아이 이마를 한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맥주로 마음을 달랬다.
드디어 나왔다. 딥치즈피자와 새우까수엘라. 하이디는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는다. 파스타까지 더 먹겠다고 해서 새우까수엘라에 파스타면을 추가했다. 배 터지게 먹었다며 뒤로 기대 한껏 포만감을 표현하는 아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다. 사진을 보겠다며 빼앗다시피 가져갔던 핸드폰도 먼저 내어주고 식당에서 마음껏 먹으라고 내놓은 귤도 신나게 가져다준다. 엄마 것 자기 것 2개를 챙겨서. 그리도 야박하던 마음이 어느새 넉넉해졌다. 마트에 가서도 카트를 끌어주고 카페에 가는 길도 불평 한마디가 없다. 카페에서도 서점에서 산 책을 읽느라 엄마를 가만 내버려 둔다. 아이가 넉넉해지니 다시 내리는 눈마저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 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아침으로 커다란 고구마와 우유, 한라봉에 치즈까지 먹어 든든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착각 때문이었다. 내가 든든해서 아이도 든든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불찰이었다. 피자빵이라도 먹고 일정을 시작했어야 했다. 그러면 모든 일정이 느긋해졌을 거다. 오랜만의 외출이라는 설렘에 빠져 아이 마음을 세심히 들여다보지 못한 내 탓이었다. 고집 센 아이 탓이 아니었다. 그래도 반성하지는 않으련다. 원인 제공은 내가 했더라도 짜증을 부린 건 아이니까 그래서 아쉬움을 참아야 했던 건 나였으니까 매번 엄마만 반성하는 것도 억울하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피자가 너무 맛있어서 그 맛과 그 식당에는 전혀 아쉬움이 남지 않아서. 오늘을 맛있게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여덟살 하이디의 일기>
일기설명: 오늘은 만춘서점을 가서 '음식, 잘 먹는 법'이랑 '무엇이든 쓰게 된다'랑 '매일이, 여행'을 싸게 샀다. 빨리 가고 싶어서 가자고 졸랐지만 엄마는 천천히 골랐다. 서점 아줌마랑 여행 이야기도 하고 책갈피 이야기도 했다. 친절했다. 마음은 행복하다.
사실 하이디가 일기에 피자 이야기를 쓸 거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아이는 주저 없이 만춘서점을 택했다.
아무래도 엄마와 자신을 벗어나
새롭게 관계를 맺은 서점 아줌마 때문이지 않을까.
어쩌면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근사한 풍경도 힘든 고생담도 아닌
새롭게 만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새삼 깨닫는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내게는 너무도 빨랐던 시간이 아이에게는 천천히였음을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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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보고 싸게 샀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