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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주에 오다

뚜벅이 엄마랑 제주보름

by 여유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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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잠시 잦아든 한낮, 아이는 겹겹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선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둘러싸여 고요해야만 할 것 같은 공간에 소란스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서있는 초조한 몸짓들. 썰매 타기가 한창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내려가고 싶어 온몸이 들썩들썩한다. 빨리 비켜, 조심해, 거기로 가면 안 돼 온갖 당부와 신나는 비명소리가 뒤섞인다. 하이디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아쉽게도 썰매가 없어 빌려도 타고 박스와 비료포대를 이용하기도 하고 그냥 맨 엉덩이로 타기도 한다. 다시 제주에 온 지 닷새째다.


10번을 넘게 다녀왔다면서 게다가 얼마 전에는 한 달을 살고 왔으면서 하필이면 겨울에 그것도 보름씩이나 왜 또 가는 거냐며 주변 사람들은 나의 제주행을 의아해했다. 사람이 겪을수록 정드는 것처럼 제주도 내게는 그랬다. 봄에 가니 여름에 가고 싶었고 가을에 가고 싶었고 2박 3일은 4박 5일이 되고 그렇게 한 달을 머물렀다. 한 달이면 충분할 것 같았지만 여행이 삶으로 변하는 순간을 경험하고 나니 이제는 제주의 삶에 갈증이 났다.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잠옷바람으로 마당에서 킥보드를 탔고 집집마다 아침 먹자는 소리에 친구들과 잠시 흩어졌다 다시 만나 내 집 네 집 할 것 없이 들락거리며 놀았다. 오전이 다 지나갈 즈음 집을 나서 나와 함께 제주를 떠돌고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면 친구들과 신나는 놀이 한 판이 다시 또 벌어진다. 놀다 지쳐 잔다는 말이 매일매일 실현되던 한 달이었다. 아이에게만 신나는 제주가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아이는 내게 혼자만의 휴식을 허락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그러다 아이들과 같이 엄마들도 한데 모여 삶을 나눈다. 밀착된 관계와 적당한 거리감이 제주의 자연 속에서 적절히 조화를 이뤘다.


무엇보다 비교가 없는 제주의 한 달은 평온했다. 영어학원은 안 보내도 되는지 수학은 학습지를 하지 않아도 되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내게 바람을 불어넣어 나를 흔드는 사람도 없었다. 주변에 온통 신나게 노는 아이들뿐이니 노는 것이 제일이라는 가치를 의심하지 않아도 됐다. 예쁜 옷을 입고 근사한 가방을 들고 세련된 옷차림으로 길을 나서는 사람도 없어 몸빼 바지여도 내가 편하면 충분했다. 그저 내 생각 그대로를 존중받을 수 있어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시간이었다.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니 온통 내가 흔들릴 일들로 가득했다. 두 눈 감고 두 귀 막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아이를 키우고 싶었지만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됐고 자주 귀가 쫑긋 세워졌다. 집 주변 학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외면하던 학원 전단지를 한번 더 읽어보게 됐다. 아이 친구 엄마가 추천하는 학원과 학습지는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아이는 12년의 학교생활을 앞두고 있다. 부모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놀이와 조금씩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삶이 될 거다. 엄마는 단단하게 아이는 자유롭게 제주의 시간을 다시 한번 만끽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예비소집일과 유치원 졸업식을 빼고 나니 내게 단 보름의 시간이 주어졌다. 남편을 또 한 번 두고 떠나야 하는 길. 초등학교 입학 선물이 되겠다는 말과 함께 남편은 우리의 제주행을 쉽게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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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이라는데 제설도 잘 안된다는데 버스마저 체인을 감았다는데 아무 데도 못 가고 제주에 간 의미가 없겠다며 안타까워하는 서울의 사람들. 그건 제주에 여행을 왔을 때의 이야기다. 제주의 삶은 다 괜찮다. 눈이 오면 눈썰매를 타면 되고 눈사람을 만들면 되고 고드름 따기 놀이를 해도 된다. 시키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하얀 눈밭에 벌러덩 드러눕는 아이를 보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제주, 마을은 눈 속에 고립됐지만 마음은 자유를 누린다. 청량한 아이의 웃음과 함께 겨울을 보내고 흔들림 없는 봄을 준비한다. 그래, 다시 오기를 참 잘했다.




<여덟살 하이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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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설명: 오늘은 **이 언니랑 고드름 따기를 했다. 마음은 편안했다. 그리고 고드름을 어딘가에 숨겼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꼭꼭 잘 숨겨두었다. 손자국 발자국도 냈다. 다음에도 같이 놀고 싶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노래 속 고드름을 직접 만지며 놀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하랴.


약속을 해서 만나야만 놀 수 있는 도시의 친구들.

다음에도 같이 놀고 싶다는 이야기에

내일 같이 놀면 된다고 흔쾌히 말할 수 있는 기회도 흔하지 않다.


흔하지 않은 일이 흔해지는 제주에서

아이의 일기를 읽으며 내 마음은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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