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육아휴직을 시작하자마자 제주에 한 달을 머무르겠다고 했을 때 지인들은 제일 먼저 같은 질문을 했다. "너 운전 못하잖아?" 남편도 없이 그것도 일곱 살 딸과 함께 차도 없는 상황에서 제주 여행이 가능하겠냐는 걱정이었다. 운전면허를 먼저 따고 가라는 잔소리는 그동안 면허도 안 따고 뭐했냐는 타박으로 이어져 결국 운전 못하는 엄마 때문에 아이가 고생하겠다는 체념으로 끝이 났다.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렌트 한 번 하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잘만 여행했었다. 자유자재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제주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주 한 달 살기의 시작과 맞물려 개편된 제주 대중교통은 오히려 내게는 호재였다. 대대적인 개편인만큼 홍보자료가 넘쳤고 새로운 시대를 반영해 애플리케이션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카카오맵 앱을 통해 버스노선을 확인하고 제주버스정보 앱을 통해 배차 간격을 확인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곱 살 딸 역시 버스 여행을 즐겼다. 버스에 오르며 씩씩하게 목적지를 말했고 운전석 뒤쪽에 설치된 TV에서 나오는 제주 대중교통체계 개편 안내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하차태그를 직접 하는 것도 뿌듯해했다.
가고 싶은 목적지로 바로 갈 수 없는 불편함, 돌아가야 하고 기다려야 해서 길에 버려지는 시간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생각의 차이다. 운전에 써야 하는 신경을 나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에게 더 쓸 수 있고 앞만 바라봐야 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더 많은 풍경을 누릴 수 있다. 돌아가고 기다리고 걸어가는 동안 여행 안에 더 많은 이야기가 쌓인다. 아이와 함께 걸으며 길에서 노래하고 춤을 췄던 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들도 제주를 더욱 가깝게 느끼게 했다.
대중교통으로 제주 한 달을 여행하고 나니 내게 몇 가지 노하우가 남았다. 제주 여행을 꿈꾸고 있으나 운전을 하지 못해 망설이는 당신께 내가 쌓은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눈다. 할 수 있을까 걱정만 하지 말고 과감히 떠나기를 권한다. 일곱 살도 할 수 있는 제주 버스여행은 더 많은 이야기들로 당신의 여행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거다.
1. 숙소는 201번과 202번 버스노선 주변에 구하자
제주 버스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들쑥날쑥한 배차간격 맞추기다. 서울에서도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던 나는 버스 배차 안내 전광판에서 두 자리 숫자의 대기시간을 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제주는 달랐다. 개편 전 일주 버스라고 불리던 201번과 202번을 포함한 극 소수의 번호만이 배차간격을 15~20분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보통은 50분을 각오해야 했고 출근 시간대를 벗어나게 되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버스도 있었다.
201번과 202번은 각각 제주버스터미널과 서귀포버스터미널을 동쪽과 서쪽으로 이어주는 노선이다. 201번은 김녕성세기해변, 만장굴, 월정리, 세화, 광치기해변 등 주요 관광지를 지나고 202번은 애월, 곽지과물해변, 협재해변, 금능으뜸원해변 등 주요 관광지를 지난다. 배차간격도 15~20분으로 짧고 바닷길을 이어 주니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나는 202번 버스가 멈추는 곽지모물 정류장에서 도보 10분 거리의 숙소에 머물렀다. 하루 여정의 시작부터 기다림을 겪게 되면 쉽게 지치는데 그러지 않을 수 있어 좋았다.
대중교통 앱으로 버스 도착 예상 시간을 확인하고 시간에 맞춰 숙소를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동행자라면 예정대로 여행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지금 나가야 하는데 조금 더 있다가 나가겠다고 할 때도 있고 아직 버스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남았는데 지금 나가야 한다고 우길 때도 있다. 때로는 나갔다가 장난감이나 책 등을 놓고 왔다고 다시 돌아가야 하는 날도 있다. 아이의 리듬에 맞춰 숙소를 나섰을 때 오래 기다리지 않고 버스를 탈 수 있는 환경은 즐거운 여행을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2. 앱 하나만 믿어서는 안 된다
네이버 지도 앱, T map 대중교통 앱, 카카오맵 앱을 사용해본 결과 제주에서는 카카오맵 앱이 제일 정확했다. 정확하다는 의미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환승 노선을 가장 잘 안내했다. 사실 제주 버스여행에는 최단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 위에 언급한 3가지 앱 모두 배차간격 고려가 없기 때문에 버스 배차간격에 따라 1시간 거리가 2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환승 노선이다. 앱을 통해 버스 노선을 확인하고 멈추면 안 된다. 선택한 노선에 해당되는 버스마다 제주대중교통 앱을 통해 배차간격을 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면 곽지모물에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을 갈 때 최단 시간 노선은 59분으로 '곽지모물 202번 > 애월환승정류장 102번 > 제주버스터미널 101번'이다. 하지만 102번과 101번은 급행버스로 배차간격이 꽤 길다. 배차간격을 확인해보고 시간대가 맞으면 위 노선을 이용하면 되겠지만 아닐 경우는 1시간 27분 노선을 선택해야 한다. '곽지모물 202번 > 제주중학교 265-1'의 노선이다. 배차간격으로 인해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앱만 믿지 말자. 카카오맵 앱과 제주대중교통 앱을 동시에 잘 활용하면 좋겠다.
3. 택시도 적절히 섞어서 이동하자
제주 버스여행에서 가장 애매한 시간대는 10시 무렵이다. 출근 시간을 비켜나면서 50분이던 버스의 배차간격이 2시간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버스 배차간격에 맞춰 12시에 나설 수도 없다. 이럴 때는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정류장까지 버스로 이동을 하고 그곳에서 택시로 목적지를 가는 방법이 있다. 곽지모물에서 제주항공우주박물관을 가는 날 202번에서 갈아타야 하는 다음 버스의 배차 간격이 2시간이었다. 버스 시간에 맞추기보다는 202번을 타고 옹포리까지 가서 옹포리에서 제주항공우주박물관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숙소에서부터 택시를 타면 편하기는 했겠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버스와 택시를 섞은 이동이었다.
이 방법은 서편에 머물면서 동편을 여행할 때도 유용했다. 곽지모물에서 에코랜드는 제주를 반 바퀴 남짓 돌아야 하는 거리다. 이때 제주버스터미널까지는 버스를 타고 여기서부터 에코랜드까지는 택시로 이동하니 비용과 시간을 적절히 줄일 수 있었다. 택시를 부를 때는 카카오택시 앱을 이용하면 된다. 정말 오지 않을 것 같던 위치도 새로고침을 하며 요청하니 결국 잡을 수 있었다. 택시를 잡기까지 제일 길게 기다려 본 것이 10분 정도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4. 기다림에 대비하자
배차간격을 정확히 예측하고 이동해도 버스를 운전하는 것은 사람이기에 조금 빠르게 도착하기도 하고 조금 늦게 도착하기도 한다. 그래서 버스를 놓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관광지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배차시간을 맞춰 관광을 끝내는 것도 쉽지는 않다. 그러면 또 기다리게 된다. 기다림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대비가 필요하다. 스마트폰에 의존할 수도 있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다른 준비를 해보자.
내 가방 안에는 늘 내 책, 아이 책 그리고 색연필과 종이가 들어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면 나도 아이도 함께 책을 읽고 때로는 그림을 그렸다. 기다림의 시간이 짧을 때는 끝말잇기, 수수께끼 내기, 노래 부르기, 흉내내기 놀이도 자주 했다. 돌아오는 길일 때는 관광지 브로셔를 보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보았던 내용에 대해 퀴즈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지겨워졌을 때 마지막 보루가 스마트폰이었다. 이때도 규칙이 있었다. 아이가 볼 수 있는 것은 갤러리와 카카오톡뿐이었다. 갤러리로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봤다. 카카오톡은 이모티콘을 골라 아빠에게 보내거나 음성키보드를 사용해 아빠에게 안부를 묻는 용도였다. 일하는 아빠가 귀찮을까 봐 '나와의 채팅' 기능을 활용해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기게 하기도 했다. 제주 한 달 동안 유튜브와 완전히 이별한 아이는 서울에 돌아온 지금도 제주에서와 같이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있다.
5. 선택권을 아이에게 넘기자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다 보면 짜증 나는 순간들이 생긴다. 갈아타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목적지까지 이동 경로를 시뮬레이션하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지 몇 번을 갈아타야 할지 중간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짐작이 가능한데 이를 설명하지 않으면 아이는 알 수가 없다. 설명한다고 해서 쉽게 이해되지도 않는다. 두 번 환승하는 것보다 때론 세 번 환승하는 것이 시간이 덜 걸린다는 설명을 일곱 살이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다.
분명 오래 걸린다고 설명을 했음에도 막상 기다림이 길어져 짜증을 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여행 목적지 선택권을 아이에게 넘겼다. 여러 후보지의 사진을 미리 출력해 사진을 보고 고르게도 했고 지도를 보며 고르게도 했다. 그리고 고른 목적지는 지도에 표시해보고 숙소와의 거리를 짐작해 보며 멀어도 가고 싶은지를 확인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며 짜증을 내다가도 "니가 가자고 해서 멀어도 가는 건데."라는 내 한마디에 아이는 짜증을 멈췄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법도 배우게 됐다. 또한 자신이 골랐으니 더욱 재미있게 구경하는 것은 덤으로 따라오는 이점이었다.
차를 타고 다녔더라면 운전을 하며 방향을 정하는 주체는 엄마, 뒷좌석에 앉아 따라오는 대상이 아이였을 거다. 하지만 버스 여행은 데리고 다니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스스로 각자의 몫을 기다리고 걸어야만 한다. 아이는 보호해야만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는 거다. "엄마, 다음에 내려야 하는 거지?" 버스에서 꾸벅 졸고 있는 나를 아이가 깨웠다. 나만큼이나 아이도 나를 보호하고 있었던 거다. 엄마와 딸보다는 서로를 존중하며 친구처럼 지낸 시간. 우리의 여행이 더욱 행복할 수 있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