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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한 달이 내게 남긴 것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저 멀리 보이는 바다로 해가 조금씩 잠겨 드는 저녁. 마당에서 아이는 친구들과 킥보드를 탄다. 따뜻한 홍차 한 잔을 손에 든 나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제주 한 달 살이 중 가장 좋았던 기억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쉼 없이 달리는 생활이었다. 영상통화로 아이 얼굴을 확인해야 하는 날들이 많았던 일상이었다. 바쁘다는 말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몸도 마음도 느긋했던 순간에 아이 역시 모든 제약을 내려놓고 마음껏 놀 수 있었다.


금요일 육아휴직 전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토요일 바로 제주로 향했다. 휴가를 떠나듯 제주로 떠났다. 아이의 유치원 등하원마저 없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한 달은 이전의 삶과는 180도 달랐다. 서서히 느려짐 없는 급격한 전환이었기에 그만큼 강렬했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게 놓인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마음이 먼저 느끼고 몸이 자연스레 따라오며 제주 한 달은 내게 느리게 사는 법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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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없는 생활이었다. 늘 시간에 쫓기며 종종걸음 쳤다. 엄마의 시간에 맞춰 아이 역시 늘 다급했다. 회사를 가야 하고 쉬어야 하는 엄마와 아빠 때문에 더 놀고 싶어도 늘 더 놀 수 없어 속상한 아이였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기다림을 뜻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려다가도 친구들의 같이 놀자는 목소리에 아이의 놀이가 시들해지기를 기다렸다. 이왕 여기까지 나서 길 근처 다른 곳도 들리면 좋겠다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가 이제 그만 가자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제주항공우주박물관과 에코랜드에서는 여섯 시간을 머물렀다. 빨래조차도 날씨가 좋기를 기다렸고 건조대가 비어 있기를 기다려서 했다.


기다림이 지루하거나 불편하다는 것은 편견이었다. 아이의 놀이를 기다리며 나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아이가 그만 가자고 할 때를 기다리며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당 한편에 빨래를 널며 햇볕과 바람에 감사하는 순간 빨래 널기는 노동이 아닌 낭만이 됐다.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장벽이 사라지니 마음에는 여유가 생겼고 기다림은 자연스러운 일이 됐고 그 속에 소소한 행복이 함께 했다.


서울에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에너지가 넘쳤고 열정이 가득했고 그 안에서 무엇을 이루며 행복했고 무엇을 하며 행복했다. 하지만 늘 부족한 시간에 행복마저 빨리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또 다음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제주에서 느낀 행복은 그 색이 조금 달랐다. 서울의 행복이 붉은빛이었다면 제주의 행복은 하늘빛 같았다. 고개를 올려다보면 보이는 하늘처럼 그냥 그렇게 늘 곁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존재로 다가왔다.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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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엄마였던 탓에 아이는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엄마하고 올 때 아이는 아빠하고 울었고 엄마보다는 아빠를 더 찾았다. 서둘러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던 엄마는 아이에게 엄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느긋한 제주 한 달 동안 아이는 나와 단짝 친구가 됐다. 이제 엄마랑 노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고 늘 엄마를 찾는다. 돌아온 유치원에서 선생님은 아이가 훨씬 더 밝아지고 애교도 더 많아지고 터프해졌다고 한다. 소심해서 걱정했던 아이는 용감해졌고 평온해진 엄마 곁에서 더 명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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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제주는 느리게 사는 법과 함께 제대로 노는 법도 알려줬다. 편해문 작가는 말한다. 아이에게는 놀이가 밥이고, 놀이의 반대는 불안이라고. 이제 곧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에게 무엇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들 학원을 여기저기 다닌다는데 나는 너무 손 놓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가 가져야 할 배움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고 불안했었다. 제주에서 잠옷바람으로 뛰어나가 마당에서 킥보드를 타고, 너네 집이 내 집인 것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며 노는 아이를 보며 알았다. 지금은 무엇을 배우는 것보다 그저 노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모든 불안을 내려놓고 마음껏 노는 것이 제일 큰 행복이고, 아이를 잘 키우는 길임을.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지금, 무엇을 잘 하려 애쓰는 대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느긋함을 만끽하고자 애쓰고 있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이렇게 가끔은 글도 쓰면서 아이가 내 곁에 없는 시간을 평온하고 보내고자 한다. 그리고 아이가 유치원을 하원하고 내 곁에 돌아온 그 시간에는 그저 재미있게 놀고자 한다. 아마 제주 한 달이 내게 없었다면 나는 매일매일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무엇을 하지 못해 자책하며 시간을 보냈을 거다.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음을 제주는 알려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아이의 행복한 시간을 내가 지켜줄 수 있는지도 배웠다.


아마 육아휴직이 끝날 즈음에는 애쓰지 않아도 서울에서도 느긋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내공이 더 강해지면 복직해서 삶이 전처럼 바빠지더라도 마음에 여유를 갖고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길면 길고 짧으면 짧다는 제주에서의 한 달은 내 다음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 그래서 한 번 더라는 욕심이 자꾸만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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