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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Jul 02. 2018

버스 안의 시간 푸어에게

집으로 가는 길, 매번 같은 버스를 탄다. 우리 집까지는 대중교통 앱으로 1시간 6분. 도보 시간 14분을 제외하면 52분 동안 버스를 타야 한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서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아 힘은 들지만 책도 보고 드라마도 보며 그 시간을 알차게 사용한다. 


그날도 다른 날과 같이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길을 지나 퇴근을 하고 있었다. 책을 읽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낯선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어, 여기가 어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번 가보고 싶은 카페, 맛있어 보이는 작은 음식집. 새로웠다.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급히 버스 안에 붙은 노선도를 찾았다. 140번.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맞았다. 다시 창밖을 살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오른쪽 창문을 보았구나. 


나는 주로 왼편에 서서 왼쪽 창문을 보았던 거다. 게다가 스마트폰과 책에 눈길을 고정했기에 창밖 풍경에 무심했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타는 버스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녔던 길이다. 고작 9개월을 쉬었을 뿐인데 그 9개월 사이에 거리가 이렇게 많이 변하지는 않았을 거다. 꽤 오랜 시간을 다닌 길. 그 길이 낯설었다. 단지 오른편이라는 이유로. 어쩌면 창밖이라는 이유로. 


매번 타는 버스의 창밖 풍경도 알아보지 못한 나, 매번 왼편에만 서는 나, 창밖 풍경보다 책이나 스마트폰만 보는 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의식적으로 오른편에 서면 문제가 해결될까. 5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창밖만 바라보면 문제가 해결될까.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못 견디는 내게 있었다. 그 사실이 놀라웠다. 매일 버스를 타면서 하루에 두 번씩 오가는 길. 고개  한번 제대로 들지 않았다니. 스마트폰을 보고 책을 보며 무엇인가 해야만 그 시간을 잘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자리에  앉으면 노트북을 꺼냈다.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기도 했다. 시간 푸어이기 때문에 자투리 시간에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시간 부자였던 휴직 기간 동안 즐겼던 삶, 카페에서 책 읽기

시간 푸어가 맞다. 회사는 내가 가진 노동력을 조금이라도 더 꺼내 쓰려하고 아이는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해야 하는 집안일도 무시할 수 없기에 시간 푸어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시간 푸어이니까로 시작된 생각이 나를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줄은 몰랐다.  조금 더 느긋해져도 되는데. 아침과 저녁마다 버스 안에서 보내는 50분 정도는 그저 멍해도 괜찮을 텐데. 안타까웠다. 시간 푸어인 나도, 시간 푸어라서 무엇인가 하지 않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나도, 무엇인가를 해야만 시간을 잘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도. 


다시 스마트폰을 꺼냈다. 좋아하는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살피다 생각을 멈췄다. 그냥 나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아무 생각 없다 졸다 다시 깨서 창밖을 보다 또 졸다하며 흘러가는 시간. 좋았다. 내 머리가 쉬어야 할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습관이 돼버린 왼편의 자리를 갑자기 오른편에 내어준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시간 푸어도 누릴 수 있다. 어쩌면 시간 푸어이기 때문에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시간을 재촉하며 종종거리는 삶.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없다면 너무 빨리 지칠 것이다. 아직도 회사는 열정을 내세우며 내 시간을 더 원하고 여전히 아이는 나와 더 오래 놀고 싶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작스레 시간 부자는 될 수 없겠지만 내 안의 에너지를 조금씩 비축하며 나아가는 삶이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버스를 탈 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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