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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유수집가 Jun 22. 2018

만족하지 않아

수요일 저녁, 7시를 조금 넘겨 사무실을 나섰고, 7시 30분에 버스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니 8시 30분이 넘었다. 평소 9시에 침대에 눕는 아이는 내게 제안한다. 9시 30분에 자면 안 되냐고. 하이디는 일요일에 연산 문제풀이 스티커판을 완성했다. 나와 같이 연산 문제집 3장을 풀면 스티커 하나를 받아 모으는 판이었다. 모아야 했던 스티커는 모두 30개. 하는 날보다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기에 완성까지는 세 달 남짓 걸렸다. 오랜 시간 정성스레 모은 스티커의 결과물은 '텔레스트레이션'이라는 보드게임이었다. 일요일 저녁 스티커판을 완성하자마자 주문했고 화요일 저녁 도착 예정이었다. 


화요일 저녁, 6시에 퇴근을 하고 회식을 가기 전 차를 주차하러 잠깐 집에 들른 남편이 전화를 했다. 하이디가 울고 있더라는 거였다. 할머니와 하교 후 문 앞에 있는 택배를 보고 텔레스트레이션인 줄 알았는데 엄마가 주문한 생활용품인걸 알고 펑펑 울고 있다고 했다. EBS 보니하니 TV를 틀어주는 것으로 아이를 달래 놓고 집을 나왔다는 남편. 쇼핑앱에 들어가 보니 택배는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전화를 해서 사실을 전해줄까 하다가 혹시나 너무 늦어 아이가 잠든 뒤에 도착할지도 몰라 마음을 접었다. 


엄마랑 텔레스트레이션을 신나게 했던 다음날 아침 엄마의 편지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하니 거실 테이블 위에 텔레스트레이션이 놓여있었다. 할머니랑 하기는 어려웠을 게임. 이 게임을 하기 위해 내일은 꼭 일찍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회사일. 7시가 넘어 사무실을 나서며 저녁을 먹고 갈까 고민이 되었지만 그러면 또 아이가 잠든 다음 집에 도착할까 봐 계획에 없던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역시나 하이디의 첫인사는 '텔레스트레이션 하자!'다. 4명 이상 같이 할 것을 권장하는 게임. 단 둘이 하니 뭐가 재미있을까 싶었지만 아이는 일부러 답을 틀리게 적으며 깔깔깔 웃는다. 


약속대로 9시 30분까지 텔레스트레이션 세 판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화요일은 복직 후 처음으로 엄마, 아빠 모두 아이가 자기 전에 집에 도착하지 못했다. 할머니와 같이 잠들었던 밤. 마음이 쓰였던 나는 아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다시 회사 가니까 어때?" "엄마랑 더 놀고 싶어. 엄마 회사 그만둬라." 퇴근한 나를 보고 펑펑 울기도 하고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타박하기도 했던 아이의 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만 두면 안돼?'도 아니고 '그만둬라.'는 단정형에 마음이 더 무거웠다. 소심한 아이가 단호하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꾹꾹 참았을지 그 마음이 보여서였다. 


복직 전날, 엄마랑 같이 학교에 가는 아이의 뒷모습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있는 내게 아이는 다시 말한다. " 엄마 나 데려다주고 회사 가라." 한 발 물러선 아이의 말. "마포 할아버지랑 일산 할머니랑 같이 학교 가면 좋잖아." 할머니, 할아버지도 번갈아 가며 고생 중이신데 아이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잠시 머뭇하던 아이는 말한다. "만족하지 않아." 싫지는 않지만 엄마가 데려다주는 만큼 좋지는 않은 하이디의 마음.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나도 만족하지 않는다. 1시간만 늦게 출근해도 아이를 데려다줄 수 있을 텐데, 1시간만 일찍 퇴근해도 아이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을 텐데. 늘 그 1시간이 문제다. 업무 스케줄에 따라 어떤 날은 1시간 늦게 출근해서 1시간 더 근무하고, 어떤 날은 1시간 일찍 출근해서 1시간 일찍 퇴근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후에 업무가 몰려 있는 오늘 같은 날은 그 1시간이 더 아쉽다. 어차피 하지 못할 칼퇴근, 출근이라도 늦게 한다면 아이와 함께 보낸 아침 시간의 에너지로 불평 없이 시간 외 근무에 몰입할 수 있을 텐데. 직원의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은데 뭐가 그리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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