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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살의 육아휴직과 여덟살의 복직
by 낯선엄마 Aug 06. 2018

내게 둘째를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이 네 명이면 좋겠다."

저녁을 먹는데 뜬금없이 아이가 말한다. 아빠, 엄마, 아이. 이렇게 세 명인 가족에서 누구 한 명이 더 필요한 것일까? 설마... 동생?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큰 언니가 필요하다고 한다. 다행이다. 나는 아이에게 동생을 만들어줄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생겼어?"

육아휴직을 한다고 하니 회사 선배가 물었다. 심지어 딱 붙는 옷까지 입고 있어 오해할 소지도 없는데 무슨 말인지. 일곱 살 아이를 위한 휴직이 흔한 일은 아니기에 둘째를 떠올렸다고 했다. 휴직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고 나니 이 선배 다시 한번 어이없는 소리를 한다. "둘째나 만들어 와라."


"니가 니 엄마 좀 설득해라"

아이를 낳고 난 뒤 끊임없이 둘째에 대한 강요를 받고 있다. 심지어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면 초면인 택시기사 조차 내게 둘째를 강요한다. 외롭겠다, 심심하겠다, 너도 대장 노릇 해봐야지. 아이를 향한 말을 애써 참아보지만 참을 수 없는 말도 있다. "니가 조르면 될 거야. 니가 니 엄마 좀 설득해라."


"제 마음대로 되나요." 

처음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야근이 많은 지금 생활로는 하나도 버겁다고. 첫 번째 이유를 듣고도 둘째를 강요하면 두 번째 이유를 말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그래도 사람들은 내 둘째에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내게 YES라는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아이의 외로움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엄마라고 나를 질타했다. 내 육아에 1도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받는 쓸데없는 걱정은 반갑지 않았다. 이제는 솔직함을 포기했다. 원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 생기지 않는 거라며 상대의 말을 막아 버린다. 


처음부터 둘째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연년생인 남동생과 크게 싸워 본 기억도 없고 동생이 있어 늘 좋았기에 결혼을 하면 아이는 둘을 낳겠다고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임신 8개월 무렵까지 입덧을 했지만 그래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출산 과정에서 처음으로 의문을 갖게 됐다.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할 수 있을까. 진통을 줄여보겠다며 무통주사를 맞았지만 그 부작용은 엄청났다. 온몸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랜 시간 지속된 진통과 금식으로 정작 아이를 낳는 순간에는 쓸 수 있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성인 6명이 번갈아 가며 내 배를 밀었고, 결국 아이는 진공흡입장치를 사용해 힘겹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TV에서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품에 안아야 하는 내가 했던 첫마디는 "한강물에 뛰어들고 싶어."였다. 뜨거운 불 한가운데 누워있는 것만 같아 얼음물을 온몸에 끼얹고 싶었다. 아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게 단지 몇 시간이면 끝날 고통이라고 했다. 무통주사 부작용이니 다음번에는 주사를 안 맞으면 된다고 했다. 글쎄, 과연 출산의 고통만 넘으면 모두 다 괜찮은 걸까. 


출산휴가 3개월을 마치고 복귀한 다음날부터 야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축기를 들고 출근을 하고 유축해둔 모유를 보냉 가방에 챙겨 퇴근을 하면서도 야근을 해야 했다. 한 사람에게 1인분 이상 2인분 미만의 업무량을 부여해 인력을 더 늘리는 대신 야근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1.9의 법칙이 엄마가 되었다고 예외일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싸운 날에도 남편과 반드시 해야만 하는 대화는 회식과 야근 일정 조율이었다. 혹시라도 겹치는 날에는 미리 SOS를 칠 대상을 물색해야 했다. 어떤 날은 친정엄마, 어떤 날은 시어머니, 또 어떤 날은 사촌동생까지 동원됐다. 아무 대안이 없던 어떤 날에는 내가 먼저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왔다가 남편이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때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던 적도 있었다. 


그나마 남편은 나보다는 시간 부자였다.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한참 앞서 출근하지 않아도 됐고, 야근도 많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의 어린이집 등 하원은 주로 남편이 책임졌다. 이런 상황을 보고 사람들은 또 말을 보탰다. 독박 육아도 아니고 남편이 육아에 적극적인데 그럼 더 둘째를 낳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보다는 더 오래 둘째를 바랐던 남편도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며 격렬하게 등원을 거부하는 아이와 씨름을 하다 중요한 아침 회의에 지각하게 된 날, 둘째 포기를 선언했다. 


"둘째는?" 그 가벼운 질문은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 있는 나를 초라하게 했다. 출산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는 내게 나약한 엄마라는 굴레를 씌웠다. 다들 바쁘게 사는데 꼭 나만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아 나를 주눅 들게 했다. 4인 이상의 가족이 정상이라는 틀을 나도 모르게 주입시키고 나는 비정상이라며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둘째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라며 쿨한 척 말을 하고서 내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해 스스로 괜히 죄인이 되어 있었다. 


5시 30분에 일어나 8시까지 출근을 하고 모두 잠든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 아이와 나누겠다며 청소는 가사도우미에게 요리는 반찬배달에 장보기는 인터넷에 맡겨도 영상통화로 아이를 만나는 날들이 더 많은 상황에서 둘째는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상황은 더 열악해진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7시가 넘는 시간까지 아이를 맡아줬지만 학교는 그렇지 않다. 8시 10분 이후에 등교를 권장하고 방과 후 수업 두 개를 들으며 제일 늦게까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5시다. 아빠는 5시 30분, 엄마는 6시가 공식적인 업무 종료 시간인데 말이다. 


주 52시간이 시행되었다고 해서 고단함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야근은 줄었지만 5시에 끝나는 아이와 6시에 끝나는 엄마의 시간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6시가 조금 넘어 사무실을 나서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8시 무렵. 놀고 싶다는 아이와 숙제는 해야 한다는 엄마의 전쟁이 끝나고 나면 아이는 잠을 잘 시간이 된다. 엄마랑 마음껏 놀지 못하는 아이는 여전히 엄마가 고프다. 게다가 주어진 업무량은 변하지 않은 채 근무 시간만 줄었으니 업무 마감에 대한 압박감과 스트레스는 배가 된다. 이미 회사에서 지친 엄마는 집에 와서 아이에게 나눠줄 에너지가 없다. 여전히 둘째는 언감생심이다. 


주 52시간이 문제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주 5일 근무가 결국에는 주말 있는 삶을 만들며 잘 정착된 것처럼 주 52시간 역시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 희망한다. 다만, 주 52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환상은 경계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육아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효율로 설명되지 않는 시간이다. 무엇 하나를 하는데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이 오래 걸리는 시간, 그저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는 시간, 돌아서면 다시 또 같은 일이 벌어지는 반복되는 시간, 아무 의미 또는 성과가 없어도 괜찮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는 이런 시간의 해석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8시간 동안 육아를 한 경우 8시간 동안 일을 한 경우와 똑같이 비교하거나 또는 돈이라는 성과가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육아의 시간을 무시한다. 


정말 그 8시간은 같은 시간일까. 단지 물리적인 숫자만 같을 뿐 같을 수가 없다. 상식적인 선에서 대화가 통하고 자신의 성취를 남기는 일과 비상식적인 생떼와 짜증을 감내하며 인내에 인내를 거듭해도 나의 성취라고 인정하기 쉽지 않은 육아는 시간의 셈을 달리 해야만 한다. 그래서 핀란드와 같은 육아정책 선진국에서는 아이가 만 13세가 될 때까지 근로시간을 20% 단축할 수 있는 '육아기 유연 근로제'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개인은 월급이 줄어드는 것 대신 육아의 시간을 택하고 사회는 이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다.  


육아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사회가 인정해주어야 한다. 일하는 엄마와 아빠가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시간의 일부를 육아에 쓰는 일이 열정미달로 손가락질받지 않는 사회. 일 대신 육아를 택한 엄마와 아빠가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 자격미달로 비난받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아이가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더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사회가 함께 해야 할 시기가 됐다. 


단지 눈에 보이는 숫자로만 계산하고 효율이라는 관점만 적용하는 시간의 셈 법이 육아에는 다르게 적용될 수 있을 때 어쩌면 저출산 문제도 해결될 수 있고 나 역시 둘째를 결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둘째를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게 둘째를 낳으라고 강요하지 말고 둘째를 낳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육아에 대한 시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나도 기꺼이 둘째를 낳을 거라고. 그때가 오면 당신의 매너 없는 강요는 품격 있는 충고가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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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일곱살의 육아휴직과 여덟살의 복직
소속 직업회사원
‘더불어 함께 그리고 느긋하게’를 마음에 새긴 채 내일보다는 오늘을 살고 싶은 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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