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빠 차에는 두툼한 지도책이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엄마의 임무 중 하나가 지도를 보며 길을 찾는 것. 아빠는 늘 태평했다. 헤매는 것도 나름 매력이 있다는 주의셔서 지도보다는 감에 의존해 길을 찾으셨다. 반면 꼼꼼한 엄마는 그 옆에서 열심히 지도를 보시거나, 차를 세워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자고 아빠를 재촉하셨다.
시골 갈림길이 늘 문제였다. 지도에서도 찾기 어려운 길. 지나가는 사람도 많지 않은 길. 아빠의 감에 의존해야 하는데 그 감도 뭐 늘 정확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래도 재미있었다. 그냥 가면 된다는 아빠와 물어보자는 엄마의 티격 거림 속에 한참을 지나쳐 차를 세워두고 느릿느릿 걸어오시는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아빠의 감은 점점 더 작은 동네로만 레이더를 세워 아슬아슬 좁은 논두렁 길을 기어가기도 했다.
하이디는 겪어보지 못할 일들. 지금의 내비게이션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다. 목적지를 입력하면 초행길도 척척 찾아갈 수 있는 시대. 그래도 가끔 헤매기는 한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놓쳐서이기도 하고, 여기서 꺾으라는 건지 저기서 꺾으라는 건지 길이 복잡하기도 하다. 그때마다 내비게이션은 말한다. "경로를 벗어났습니다. 경로를 재요청합니다."
다시 맞는 길을 찾아서 다시 제대로 가면 되니 걱정이 없었는데 요즘은 신경이 쓰인다. 경로를 재요청한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왜 길을 틀렸냐며 타박하는 하이디 때문이다. 빨리 도착하고 싶은 목적지일수록 하이디의 반응은 매섭다. 배가 너무 고팠던 토요일 저녁, 고깃집을 향했다. 만석인 고깃집. 여기서부터 짜증이 난 하이디는 두 번째 고깃집을 향하는 길에 "경로를 재요청합니다."의 음성을 듣자마자 화를 낸다. "이러다 강릉까지 가겠다."
3월 초, 강릉 여행에서 만난 일출
하이디는 울상인데 엄마와 아빠는 웃고 만다. 얼마 전 다녀온 강릉이라고 이렇게 응용하는 센스라니! 고슴도치 부모의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이다. 뒷자리에서 열을 팍팍 내는 하이디는 뒷전이고 엄마와 아빠는 맞장구 연속이다. '여행이 하이디 표현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 좀 봐!', '그래, 여행을 자주 다니는 게 좋다니까!', '다른 거 배우느라 돈 쓰고 시간 쓰지 말고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해!' 여행 예찬가, 엄마와 아빠. 그러니 여러 번 경로를 벗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떠나야 한다. 이번 주말에는 봄 꽃 찾아 저 남쪽으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