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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아이도 함께 자라는 여행

뚜벅이 엄마랑 제주보름

by 여유수집가

윙윙 덜컹덜컹. 바람소리에 몇 번이고 잠을 깼다. 평소에는 눈을 감으면 깰 때까지 아이가 우는 것도 모르고 잠을 자던 내가 중간에 잠을 깬 것이다. 남편이 없는 불안과 아이를 나 홀로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나를 예민하게 했다. 눈은 내리지 않지만 나뭇가지가 꺾일 듯 바람이 거센 아침이다. 그래도 나는 요가를 하러 집을 나서고 하이디는 직접 고른 영화를 보며 홀로 남았다.


어제 인연을 맺은 성이 엄마도 요가를 하러 왔다. 성이가 우리 집에 갔다고 한다. "같이 영화 보면 되겠네요. 제가 틀어주고 왔거든요." 성이 엄마는 웃으며 아닐 거라고 한다. 성이는 지금까지도 영상 매체에 노출을 시키지 않아 친구들이 보고 있으면 다른 놀이를 하자고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다. 어른이 없는 상황에서 강렬한 영상의 유혹을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아이가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까. 보지 않았기에 더 보고 싶은 것이 아이의 마음이 아닐까. 게다가 하이디가 쉽게 성이의 말에 동조할 것 같지도 않았다. 성이가 보지 말자고 해도 하이디가 같이 보자고 할 듯했다. 나 역시 웃으며 성이 엄마의 이야기에 동조했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강하게 그녀의 생각을 부정하고 있었다.


TV는 켜져 있고 여덟 살 두 꼬마는 그 TV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리라 짐작하면서 문을 열었다. 입꼬리마저 올라갔다.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이겼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앞을 바라봐야 하는 아이들 시선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궁금한 장면이라 이야기하느라 그런가 보다 하고 시선을 옮겼는데 TV의 까만 화면만 눈에 들어왔다. 픽사의 화려한 영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영화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 "성이가 동물 놀이하자고 해서." 하이디는 씩씩하게 대답한다. 잘했다며 힘없이 대답하는 내게 당부를 하는 하이디. "영화는 나중에 볼 거야."


누구보다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욱더 아이의 마음을 잘 읽게 됐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자신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를 내 소유로 판단한 오만이었다. 아이는 나와는 다른 사람. 자신만의 판단을 한다. 나도 모르는 새 자라고 나도 모르는 새 변하며 자신만의 길을 간다. TV보다 친구랑 노는 것이 좋았던 아이는 기꺼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친구와 함께 놀았다. 어차피 영화는 나중에도 볼 수 있으니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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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만든 레고를 가지고 놀고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고 동물 놀이도 한다. 장난감은 레고 한 세트와 하이디가 잘 때 안고 자는 인형 하나밖에 없는데도 여러 놀이를 만들어가며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아직도 바람은 거세기만 하고 아이들 노는 모습도 너무 예뻐 외출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너희들은 너희들끼리 나는 나대로 놀자며 책을 폈다. 하지만 책에 눈을 고정하기는 어려웠다. 자꾸만 아이들에게 눈이 갔다. 엄마의 시선이 같이 놀자는 마음으로 읽혔던지 하이디가 숨바꼭질에 나를 끼워 넣는다. 바라볼 때는 좋았는데 엉덩이가 무겁다. 너무 노골적이었던 나의 시선을 탓하며 다섯 번만 하겠노라 선언했다. 좁은 집에 숨을 곳이 어디 있겠나. 뻔한 곳에 다 보이게 숨으면서도 깔깔 웃기만 하는 아이들. 다섯 번은 웃음의 마력에 빠져 열 번을 넘어간다.


엄마는 약속을 지키고도 남았으니 아이들 둘만의 시간을 보장하겠노라는 거창한 핑계로 자리를 피한다. 성이 엄마를 찾아갔다. 숙소 내에 간헐적으로 문을 여는 카페가 오늘따라 고맙게도 문을 열었다. 성이 엄마와 또 다른 두 명의 엄마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의 주제는 '제주에 오니 이런 것이 달라졌어요'다. 나는 지난 제주 한 달 여행 이후 유치원 선생님이 하셨던 말을 들려줬다. "하이디가 터프해졌어요." 쌍둥이 엄마는 엄마 껌딱지 아이들이 조금 더 엄마와 떨어져 논다고 했다. 아들 둘 엄마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불안해하지 않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성이 엄마는 이렇게 매일매일 바다에서 놀아본 적이 없다며 바다와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습은 조금씩 달랐지만 각자의 삶에 무척 의미 있는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실 하이디는 친구와 친해지기를 어려워하는 아이였다. 유치원에서도 늘 1학기는 방관자로 생활했다. 친구들 무리에 쉽게 끼어들 수 없어 맴돌기만 했다. 2학기가 돼서야 친한 친구가 생겼다. 수업 시간에 발표도 잘하고 선생님들께 애정표현도 잘하는데 유독 또래 아이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해서 선생님들도 나도 걱정이 많았다. 아이의 기질이 그런 거야. 조금 느리게 친해지면 어때. 결국은 친구가 생기니까 괜찮아. 마음을 다스리지만 걱정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제주에 오니 하이디는 내가 알던 하이디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친구와도 척척 인사하고 같이 놀자고 부르고 남의 집에도 먼저 찾아가는 아이가 됐다. 제주 그리고 여행이라는 특수성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이는 자라고 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주에 또 올 수밖에 없다. 꼭 관광지를 가지 않고 숙소에만 머물러도 만족할 수 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숙소에 머물러 삼시세끼를 해 먹어야 했지만 근사한 하루였다. 아이는 친구의 부탁을 먼저 들어주며 또 한 번의 성장을 보여줬고 나는 마음 맞는 동지들과 생각을 키웠다. 왜 그렇게 제주를 가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겠다. 나도 아이도 함께 성장하러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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