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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살에게는 어쩌면 무리, 융프라우에 오르다

일곱살과 스위스 일주일

by 여유수집가

2001년, 연년생의 남동생과 나는 한 달 동안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때 우리는 딱 하룻밤을 스위스에서 보냈다. 이탈리아에서 밤새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으로 와서 융프라우에 오르는 일정이었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에게 가장 비싼 관광일정. 유스호스텔 지기에게 융프라우에 오르는 조금 더 싼 방법은 없는지를 물었다. 그는 단번에 가지 말라고 했다. 날씨가 너무 흐리니 아쉽기만 할 거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고. 그래, 아무래도 너무 비싸긴 했다며 과감히 포기했던 곳. 2017년 7월, 이번에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다시 도전이다.


이른 아침, 그린델발트역에서

어제에 이어 맑은 하늘. 두 번째 방문이 갸륵해서인지 융프라우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스위스패스로도 그냥 갈 수 없는 곳. 챙겨 온 동신항운 쿠폰과 스위스패스로 할인을 받았음에도 1인 132프랑. 2001년이나, 2017년이나 비싼 관광임에는 틀림없었다. 과연 비싼 값어치를 할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스위스 여행의 상징(?)이고, 한 번 실패했으니 두 번째는 괜한 오기로도 가보고 싶었다. 그린델발트역에서 클라이네샤이덱으로 가서 한 번 열차를 갈아타고, 융프라우요흐로 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성수기에 인접해있어 예약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했다. 서툰 영어로 헤매지 않고자 예약시간을 미리 정하기 위해 이동시간, 체류시간 등을 애써 계산해 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침 일찍 나선 때문인지 예약은 필요가 없었다. 예약을 해야 할 경우라면 표를 구입할 때 직원이 예약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시간도 적절하게 추천해준다고 하니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물론 예약비는 추가되지만.


그린델발트에서 클라이네샤이덱까지는 제법 기차에 여유가 있었다. 바로 옆에는 파키스탄에서 온 7살 여자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앉았다. 비슷한 가족 구성에 호감을 느낀 우리는 서로 가족사진을 찍어주며 인사를 나눴다. 이번이 기회라며 파키스탄 친구와 영어로 이야기해볼 것을 권했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는 자꾸만 아빠와 엄마에게 시키기만 할 뿐이었다. 그린델발트와 라우터브루넨에서 각각 출발한 기차가 만나는 클라이네샤이덱. 예약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두 기차가 만나는 곳이라 사람이 몰리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스위스 여행 중 가장 빽빽한 기차였다.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클라이네샤이덱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가족의 아빠가 아이 맞은편에 남은 한 자리에, 엄마는 통로 건너편에 앉은 남편의 맞은편에 앉았다. 더 이상 자리는 없고, 두 명의 아이들도 부모를 따라 앉고 싶어 했다. 엄마가 한 아이를 무릎에 앉혔고, 남편은 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겠다며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곧바로 말렸다. 양보를 하려면 그 부모가 하면 될 것이고, 30여분을 올라가는데 고산지대로 가는 길이니 애써 서서 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양보하지 않기를 잘했더라. 엄마 무릎에 앉은 아이도 곧바로 일어나 객실 밖으로 나가는 듯하더니 보조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앉은 모양이었다. 사실 부모는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든 통로에서 왔다갔다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앉아있었고 말이다.


융프라우요흐에 내리자마자 찬 기운이 한 껏 밀려들었다. 아이는 기차 안에서 옷을 껴입었지만 나는 미처 그러지 못해 챙겨 온 초경량 패딩조끼를 껴입었다. 긴팔 티셔츠에 스카프를 두르고, 패딩조끼를 입고 그 위에 봄가을용 고어텍스 재킷을 입으니 융프라우의 겨울도 견딜만하더라. 아이는 패딩조끼가 없어 긴팔 티셔츠 두 개에 두꺼운 카디건을 입고 역시 스카프를 두르고, 위에 봄가을용 고어텍스 재킷을 입었다. 전혀 춥지 않다고 했다. 초경량 패딩이나, 얇은 옷을 껴입으면 충분한 날씨였다.


투어코스 안내판을 따라 관광을 나섰다. 우리 바로 앞에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관광을 하고 있어 그들을 따라가면 되기도 했다. 융프라우 파노라마, 스핑크스 전망대, 알파인 센세이션, 얼음궁전, 플라토 테라스 순서로 관광을 했다. 이 순서는 크게 유념할 필요는 없겠다. 친절한 안내판이 곳곳에 있고, 중국인, 일본인 할 것 없이 단체 관광객이 많아 그 행렬을 조금만 살펴보면 되니 말이다.


반짝반짝 커다란 유리구슬은 왕국 같고, 얼음궁전은 스케이트를 타는 것 같고. 알파인 센세이션까지는 아이의 컨디션이 좋았다. 여름에 겨울왕국에 왔다며 엘사는 진짜로 어디에 있냐며 재미있어했다. 융프라우의 하이라이트 플라토 테라스를 앞두고 아이는 간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동신항운이 제공한 컵라면 무료 쿠폰도 있겠다, 살뜰하게 챙겨 온 납작 복숭아도 있겠다.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가 먹고 싶다고 한 프링글스도 구입, 뜨거운 물이 담긴 신라면을 받아 테이블에 앉았는데 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단다. 분명 식당으로 오는 길에 화장실에 들렸었는데 말이다. 이때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한 번의 화장실은 네 번까지 이어졌고, 네 번의 화장실에 다녀오며 아이는 토까지 했다. 고산병 증상이었다.


바로 내려가기로 했다. 축 쳐진 아이를 3,454m의 고산지대에 계속 둘 수가 없었다. 기차역으로 가자며 일어서는데 아이는 눈을 꼭 만지고 싶다고 했다. 토를 하고 나니 괜찮아졌다고. 그러면 아주 잠깐만 보기로 다짐을 하고 플라토 테라스로 나섰다. 막상 밖으로 나오니 아이는 여기가 정말 겨울왕국이란다. 가깝게 보이는 꽁꽁 언 봉우리는 무서운 마시멜로우 같다고 했다.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눈을 만지고, 발로 차며 좋아했다. 그렇다고 아이의 상태를 믿을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빨리 사진을 찍고 내려가기로 했다.


융프라우에 오면 꼭 한 장은 찍는다는 스위스 국기 사진. 서두른다고 마음대로 되나. 기차가 꽉 차서 올라온 만큼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인도인 관광객 여러 명이 서로를 찍어 주느라 도무지 우리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고. 마음이 급한 남편은 나와 아이만을 찍어주고, 자신은 스위스 국기 인증샷을 포기했다. 다른 사진으로도 충분하다는 '가장'다운 말을 남기고. 사실 아이가 아빠와 화장실에 가겠다고 해서 아이와 네 번을 화장실에 다녀오며 진을 뺀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사진 몇 장만 휘리릭 찍고, 풍경은 쓱 한 번 훑어보고, 놀라고 음미하고 감동할 시간 없이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실내로 들어온 아이는 곧바로 축 쳐져서 걷기가 힘들다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업었다. 업자마자 잠이 든 아이. 부모의 욕심이 아이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아이는 내려오는 기차에서 계속 잠을 잤다. 한 번을 갈아탄 기차에서도 쭉. 마지막으로 내려야 하는 라우터브루넨에 이르러 잠을 깬 아이에게 물었다. 괜찮냐고. 아이는 개운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배도 아프고, 화장실도 많이 가고, 잠도 잤지만 겨울왕국이 좋았다고 했다. 그래, 나쁘고 힘든 기억으로 남은 것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그 높디높은 산은 알곱살 아이에게는 무리였다.


클라이네샤이덱에서 라우터브루넨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스위스 여행의 상징과 같은 곳이고, 스위스에 간다고 하며 다들 이구동성으로 융프라우에 가느냐고 물어 한 번은 가볼만한 곳이지만 사실 이 비용과 시간을 들여 이렇게 꼭 가야 하는 곳인지는 의문이 남는다. 아이의 고산병 증세 때문에 빨리 내려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날씨와 이 시간에 차라리 피르스트를 한 번 더 가거나, 멘리헨을 오르거나 아니면 루체른에 가서 필라투스를 올랐거나 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이야기를 남편과 지금도 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남은 조금의 아쉬움이라면서.


물론 만년설에서의 인증샷이자 인생샷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기는 하다. 내 인생 언제 이렇게 만년설을 바로 코 앞에서 보고, 직접 만져보고 할 수 있을까. 인생 단 한 번의 순간이라고 생각하면 또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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