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살과 스위스 일주일
라우터브루넨에 도착하니 시간은 한 시가 넘어있었다. 잘 버텨준 아이에게 쿱에서 장난감으로 사주기로 했다. 사실 우리는 하루에 하나씩 쿱에서 아이 장난감을 사주고 있었다. 독일어로 된 공주 잡지에 시답잖은 장난감이 붙어 있는 형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라우터브루넨도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쿱이 있었다. 하지만 루체른이나 그린델발트보다 작은 규모. 아이가 원하던 장난감은 없었다. 저녁에 그린델발트로 가서 사자고 아무리 설득해도 아이는 완강히 거부하고, 정말 어렵게만 보이는 독일어 도날드 만화책을 골랐다. 도대체 무엇을 보겠다는 것인지. 그래도 아까워하지는 않기로 했다. 책 한 권으로 아이에게 이 여행이 더 즐거워질 수 있다면 만족하는 것으로.
기차에서 이미 검색해온 라우터브루넨 맛집으로 향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식당에서 먹은 밥은 루체른 교통박물관 입구의 레스토랑, 리기산 정상의 레스토랑이 다였다. 그리고 모두 너무 짜서 실패했고. 이번에는 추천 맛집이니 기대감을 가졌다. 스위스 전통 가정식인 뢰스티와 입맛에 맞을 나폴리 스파게티, 아이용 치킨너겟을 시켰다. 목을 축일 콜라와 맥주는 당연히 덧붙였고. 참고로 아이의 물은 쿱에서 사간 것이 있어 그것을 마셨다. 스위스는 물도 다 돈이기 때문에.
뢰스티는 약간 짰지만 그동안 원체 짠 음식에 깜짝 놀랐었기에 맛있게 먹었고, 나폴리 스파게티와 치킨너겟은 당연히 맛있었다. 든든하게 배도 채웠겠다 이왕 라우터브루넨에 왔으니 폭포를 보러 가기로 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부터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슈타우프바흐 폭포. 사진에서 본 것은 트뤼멜바흐폭포였지만 먼저 가까운 곳을 찾기로 했다. 폭포 입구까지는 멀지 않았는데 막상 올라가려니 한참. 너무 뜨거운 햇빛과 바싹바싹 마르는 더위에 그냥 밑에서만 보기로 했다. 저 물줄기를 그대로 맡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참을 바라보며, 폭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이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나선 길. 너무도 뜨거운 햇살에 트뤼멜바흐 폭포는 마음에만 두기로 하고, 뮈렌으로 향했다.
계획된 일정으로 라면 남은 오후는 인터라켄 관광이었다. 하지만 스위스에 머물러보니 10시에 지는 해. 인터라켄 관광만 하기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일정 변경. 다음날 예정이었던 뮈렌에 가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도 남편과 잠시 이별하는 일정. 1일 1놀이터의 목표 달성을 위해 나와 아이는 최종 목적지를 알멘트후벨로 하고, 남편은 쉴튼호른에 오르기로 했다. 스위스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나는 피르스트와 알멘트후벨을 대답했다. 사진으로 보는 알멘트후벨의 놀이터와 놀이터를 둘러싼 풍경이 너무 근사했기 때문이다.
라우터브루넨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그뤼츠알프로 가서 등산열차를 타고 뮈렌으로 가는 길. 뮈렌으로 가는 길 역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너무 예쁜 동화 속 세상이었다. 1,650m 높이에 있는 마을. 늘 내려다 보이던 동화 속 세상이 점점 내 눈높이와 같아지는 다 같은 동화가 아닌 조금씩 다른 변주로 내 마음을 흔들었다. 뮈렌 역에서 각자의 길로 나선 우리. 나와 아이는 뮈렌의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알멘트후벨로 향하는 푸니쿨라 정류장이 마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푸니쿨라로 5분. 나의 동경이었던 알멘트후벨의 놀이터에 도착했다.
역시 놀이터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똑같았다. 해발 1,907m에 위치한 놀이터. 묀히봉, 아이거봉, 융프라우산에 둘러싸인 놀이터. 아이가 놀기에도 엄마의 쉼에도 적격이었다. 지금까지의 놀이터와는 또 다른 매력은 물놀이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것. 아이들이 물길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꾸며진 놀이터에서 다시 한번 감탄을 한다. 스위스는 내게 늘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시설뿐만이 아니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물 긷는 펌프를 서로 기다려주고 양보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물을 전해주기도 하며 노는 아이들. 행동으로 바로 보여주며 소통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내 기대를 넘어섰다.
미끄럼틀에 오르는 사다리. 일곱살 아이도 주저하다 올랐는데 세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도전을 했다. 뒤에 여러 명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 내 편견일까. 이 상황이 한국이었다면 분명 누군가가 나서서 세살 아이를 들어 올려줬을 거고 아니면 기다리던 아이들의 아우성이 심해졌을 거다. 그런데 여기는 달랐다. 세살 아이의 아빠와 기다리는 아이들 모두 "Cheer up!" 응원을 했다. 마침내 스스로 세살 아이가 미끄럼틀에 오른 순간 모두 함께 박수를 치면서 말이다. 분명 우리 딸까지 함께 서로 모르는 친구들이었는데 말이지. 여유 때문일까. 국민성 때문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지만 기다림의 느긋함, 함께 응원하는 마음이 참 따뜻했고, 왠지 모르게 부러웠다.
그렇게 뜨겁던 햇빛이 구름에 가려 아이가 놀기에 참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변덕스러운 날씨는 한 방울 두 방울 비를 뿌렸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방수가 되는 옷과 우산 모두 아빠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빗줄기가 거세질까 걱정이면서도 조금 더 조금 더 하며 아이의 노는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이런 놀이터를 다시 만나기 쉽지 않다는 생각과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을 만날 기회 역시 쉽지 않다는 마음 그리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내 시선 역시 너무 흐뭇했기 때문이었다. 한 명 두 명 놀이터를 떠나고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고. 우리도 결국 푸니쿨라를 통해 다시 뮈렌으로 내려왔다.
하늘은 장난도 심하다. 뮈렌에 도착해 비를 맞고 걷는데 다시 만난 마을 놀이터.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비가 온다며 말리는 동안 어랏, 햇빛이 고개를 내밀며 비가 그쳤다. 놀이터에서 더 놀라는 신호인가 보다. 이번에 만난 사람은 뮈렌 동네 주민 가족. 갓난쟁이를 태운 유모차를 끄는 엄마와 아장아장 걷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나온 아빠였다. 우리의 일곱살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에게 먼저 시범을 보이며 미끄럼틀도 오르고, 흔들 다리도 건넜다. 아기에게 한국말로 계속 말을 걸면서. 다행히 아기의 아빠가 딸아이의 마음을 읽고, 쉬운 영어로 이런저런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서 더욱 신난 아이. 그렇게 또 삼십여분을 놀다 보니 다시 비가 내렸다.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뮈렌의 가족도 우리도 각자의 길을 나섰다.
뮈렌 역에 도착해 아빠에게 카톡을 보내니 삼십여분이 더 걸린단다.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사 올 것이라는 말로 달래며 아이와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비는 그쳤고. 아빠는 역으로 돌아오는 길, 뮈렌의 인생샷 포인트라는 그루터기를 발견했다. 비도 그쳤겠다. 아직 해도 지지 않았겠다. 그루터기를 내 것 삼아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기 때문일까. 잠시 헤어졌던 아빠를 만났기 때문일까. 마음에 드는 아이스크림을 먹었기 때문일까. 아이가 이렇게 사진 찍는데 협조를 해줄 줄이야. 스스로 하고 싶은 포즈도 이야기하며 늘 포즈를 애걸복걸하던 엄마와 아빠를 뿌듯하게 해주었다.
뮈렌에서 먹을까. 인터라켄에서 먹을까. 그린델발트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을까를 의논하는데 아이의 주장. 집에 가서 먹잖다. 아, 한국에서도 외식을 자주 하고, 반찬은 배달시켜먹는 워킹맘인데 왜 스위스까지 와서 집밥이란 말이냐. 하지만 아이의 주장은 완강했고. 결국 우리는 한국에서 공수해온 카레로 저녁을 해 먹었다. 집밥 박선생의 등장이다. 어쩌면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융프라우 고산병부터 너무 뜨거운 햇빛 아래 걷기도, 또 중간에 비를 맞기도 했고. 사실 순탄했던 하루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하루. 집에 돌아오니 그린델발트는 예상하지 못했던 마을 축제 중이었다. 주말도 아닌 금요일도 아닌 수요일인데 말이다. 특히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우리 숙소는 1층이 바였는데 바 앞마당에서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아이를 재워두고 부엌 창문을 통해 공연을 즐길 수 있어 좋았지만 피곤함에 먼저 잠을 청하려니 흥겨웠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것 역시 우리 몫이었다. 그래도 이런 뜻하지 않은 이벤트가 있기에 여행은 더욱 흥미진진한 법!
<맛집 추천>
라우터브루넨의 HOTEL RESTAURANT OBERLAND
- 3DL COLA 4프랑
- BIER MEDIUM 4.5프랑
- OBERL POSTI 23프랑
- CHICKEN NUGGETS 11.5프랑
- SPAGH.NAPOLI 17프랑
* 합계 60프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