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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도에도 2017년에도 좋은 슈피츠를 걷다

일곱살과 스위스 일주일

by 여유수집가
하더쿨룸에서 '호수의 사이', 인터라켄을 찍다

높은 곳으로만 올라 다닌 우리. 오늘은 낮은 곳을 찾기로 했다. 스위스가 특별히 더 아름다운 이유는 호수와 산의 어우러짐 때문이다. 인터라켄 역시 '호수의 사이'라는 뜻으로 융프라우와 함께 툰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스위스 내에서도 그 유명세가 남다른 것이고. 오늘은 산보다는 호수를 중심에 두고, 툰 호수 주변에 위치한 휴양마을인 슈피츠를 찾기로 했다.


호수 주변에 위치한 예쁜 마을은 참 많았다. 툰 호수 주변의 툰, 메링엔, 브리엔츠 호수 주변의 이젤트발트, 브리엔츠 등이 그랬다. 많은 마을들 중에 슈피츠를 고른 이유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년생 남동생과 함께 한 한 달의 유럽배낭여행. 30일의 일정 중 딱 하루 머물렀던 스위스는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애초 계획했던 융프라우는 날씨 때문에 포기, 대신 우리가 선택한 일정이 슈피츠였다. 그리고 차선이 오히려 최선이 될 수 있음을 느꼈던 시간. 그 좋았던 기억이 나를 이곳으로 다시 이끌었다.


아침 일찍 남편은 인터라켄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떠났고, 나와 아이는 느릿느릿 준비를 마친 다음 쿱에 들러 아침 거리를 사서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기차 1등석에는 나와 아이 둘 밖에 없었기에 더욱 마음 편하게 요거트와 빵을 먹으며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스위스를 다니다 보면 너무 쉽게 너른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 속에 건강하게 자라기 때문인지 요거트 또한 싱싱함을 입 안 가득 퍼뜨렸다. 쿱에 갈 때마다 요거트를 사야 했던 이유다.


패러글라이딩 착지 장소는 동역에서 서역으로 가는 가운데 즈음에 위치한 잔디밭이었다. 아침부터 햇살이 따갑기만 한 날씨.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아빠를 만나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얼마나 근사한지. 늘 동동거리며 살았던 서울의 삶이 갑자기 조금은 서글퍼졌다.


그린델발트에 머물다 인터라켄으로 나오니 그린델발트는 작은 읍내 마을, 인터라켄은 하나의 도시였다. 자연으로만 다녀서일까. 갑작스러운 도시의 느낌이 어색하게까지 느껴졌다. 바로 며칠 전까지 엄청나게 큰 대도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번잡함보다는 단순함,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더 마음에 닿는다. 아무리 도시 느낌의 인터라켄도 높은 건물은 아주 드물게 있을 뿐. 탁 트인 하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 막힘없이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역시 큰 축복이었다.


너무 좋았다며, 하늘에 올랐던 그 높이만큼 기분이 붕 떠 있는 아빠와의 재회. 인터라켄 동역에서 서역으로 가는 길의 번화한 거리 곳곳을 구경했다. 스위스 여행 기념으로 아이에게 꼭 사주고 싶었던 하이디 옷도 구입하고, 아이의 시선을 잡아 끈 뮤직박스도 구입했다. 굉장히 다양한 노래의 뮤직박스들 가운데 나는 스위스다운 에델바이스를 적극 추천했지만 아이는 자기에게 익숙한 Old McDonald had a farm을 골랐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기념품 가게인 거리. 나무 소도 빅토리아 녹스 칼도 소주잔도 이것저것 사고 싶었는데 남편의 한 마디, 다 짐이니 체르마트 가서 사자는 말에 더는 욕심을 낼 수 없었다. 한국에서 이미 너무 많이 싸온 짐을 끄느라 고생하고 있는 남편이었기에 고집쟁이 내가 온순해질 수밖에.


남편의 바람인 한식당, 강촌에서 불고기 정식으로 점심을 먹은 우리는 인터라켄 서역에서 기차를 타고 슈피츠로 갔다. 슈피츠 역은 언덕 뒤에 있고, 쭉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면 선착장이 있기에 기차로 가서 유람선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그린델발트의 살레들이 농촌 또는 산촌 마을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면 한층 신식으로 세련된 슈피츠의 집들은 고급 휴양마을의 면모를 뽐냈다. 호수를 바라보며 창이 나 있고, 호수에는 수많은 요트들이 정박해있는 마을. 그리고 호수 저 멀리로는 어김없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산들. 매일 이 풍경을 바라보고 산다면 아쉬운 것이 무엇일까. 스트레스가 있기는 할까. 느긋함이 절로 풍기지 않을까. 스위스에 머무는 매 순간이 그렇듯 부러움은 내 마음을 채웠다.


슈피스 선착장 근처에도 어김없이 놀이터가 있었다. 산속에 있지 않아서인지 그늘막까지 쳐져있는 놀이터. 역시나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돋보였다. 이 곳에는 모레 놀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물놀이 시설이 있었고, 모두 함께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비치되어 있었다. 누가 놓고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은 장난감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어 외국 친구와 우리 일곱살도 함께 놀 수 있었다. 늘 산을 바라보며 놀이터에 머물렀다면 이번에는 호수에 반짝이는 햇빛을 넋 놓고 보며 놀이터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전의 놀이터들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아빠와 함께. 시소도 그네도 아빠가 아이에게 맞장구를 쳐주어 나는 더욱 여유롭게 자유롭게 오롯한 내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고.


유람선을 타고 다시 인터라켄 서역으로 돌아가는 길. 너무 강렬한 햇빛에 그늘을 찾아 카페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카페 안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저절로 발길은 뜨거운 햇볕 아래를 향했다. 인터라켄으로 가기 전 중간 기착지에서 호수를 수영장으로 삼고 즐기는 피서객을 볼 수 있었다. 왜 수영복을 챙겨 오지 않았을까 절로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맑은 물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누릴 수 없음이 아쉽기만 했다. 사실 나는 수영도 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할 수 있다면 내 몸의 온 감각으로 이 맑은 자연 모두를 느끼고 가고 싶음이었다.


넓은 호수만을 움직였던 유람선은 인터라켄으로 향하며 좁은 수로를 지나게 된다. 이 역시 새로운 느낌, 새로운 감탄이었다. 맑은 물, 푸른 산, 파란 하늘. 어쩌면 비슷한 풍경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비슷함 속에는 놀라운 변주들이 숨겨져 있어 끊임없이 내 마음을 뛰게 만든다. 움직이지 않는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는 자연 속의 여행이 이토록 다이내믹할 수 있음을 새삼스레 배운다.


인터라켄 서역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동역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4시. 10시에 해가지는 스위스는 아직 한낮이었다. 정말 간절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도시와 다를 바 없는 인터라켄에는 있을 것이라 믿고 카페를 찾았다. 유레카! 드디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었다. 유람선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우리에게 바리스타가 권한 것은 아포가토였다. 시원한 커피 종류는 아포가토뿐이란다. 그러고 보니 뜨겁디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사람들이 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더라는. 한국에서는 7월이면 기본 하루에 두 잔씩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이렇게 귀할 줄은 몰랐다. 엄마와 아빠는 너무도 반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일곱살은 아이스크림으로 카페 놀이를 하고,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하더쿨룸이다.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은 시원했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인터라켄은 근사했다. 정말 '호수의 사이'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 역시 저 아래 조그맣게 보이는 집을 보고 멋있다고 놀라며, 개미집 같다 말했다. 아빠는 너무 근사한 풍경에 노을까지 함께 누리고 싶어 하더쿨룸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자고 아이를 졸랐다. 하지만 집밥박선생의 집밥 사랑은 완강했다. 결국 몇 번의 설득에도 실패한 우리는 다시 그린델발트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도 풀 수 있는 아쉬움은 최대한 풀고 가기로 했다. 수영복이 없어 호수에 풍덩하고 빠질 수는 없었지만 발을 담글 수는 있기에 인터라켄역으로 가기 직전 호수에 과감하게 발을 담갔다. 만년설이 흘러들어 그럴까. 쨍하게 차갑고, 쨍하게 맑은 물.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으며 어쩌면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정말 자연은 사람을 여유 있게 느긋하게 그 느림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애써 생각을 하지 않고도, 애써 행동을 하지 않고도 그냥 가만히 보내는 시간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뜨거운 햇살 아래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노곤함이 밀려왔고, 집에 돌아가 밥을 차려야 할 생각을 하니 즐거웠던 마음이 갑자기 가라앉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갤럭시탭! 집에 가서 갤럭시탭을 가지고 나오기로 하고 갤럭시탭을 보며 외식을 하자고 아이를 설득했다. 집밥 사랑보다 갤럭시탭에 대한 사랑이 컸던 아이는 너무 쉽게 그러겠노라 집밥을 포기했다. 탭에게 만능 해결사 자리를 내어준 것이 조금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당장은 제대로 된 저녁을 편하고 즐겁게 먹을 수 있다는 만족감에 쾌재를 불렀다.


그린델발트의 맛집이라고 한국에서부터 알아온 Bebbis에서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며 스테이크와 슈니첼, 그리고 치킨 샐러드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시원하게 넘어가는 맥주를 느끼는 순간. 이 보다 더 근사한 하루의 마무리가 있을까. 아이는 탭에게 잠시 맡겨두고, 남편과 나는 편하게 어른들의 대화를 나눈 여유로운 저녁이었다. 물론 어른들의 대화도 정말 너무 좋다가 전부였지만.




<맛집 추천>

그린델발트의 Bebbis Restaurant

- Beef Steak 28.5프랑

- Wiener Schnitzel 24.5프랑

- med. Chicken-Salsde bowl 17.5프랑

- 3dl Beer 4프랑

- 5dl Beer 5.5프랑

* 합계 80프랑

* 스테이크와 슈니첼에 샐러드가 같이 나와서 치킨 샐러드는 시키지 않아도 충분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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