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살과 스위스 일주일
그린델발트에서 3박을 끝내고, 오늘은 체르마트로 가는 길. 마지막 1박을 남기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시 무거운 캐리어를 끌어야 하기 때문일까.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다시 오겠다며, 다시 오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더 미련이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체르마트까지는 기차를 세 번 갈아타야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거의 다 먹었기에 조금은 가벼워졌으려니 했던 캐리어는 여전히 무거웠고, 그 캐리어를 끌어야 할 남편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무거웠다. 에어비앤비의 제일 큰 문제는 계단. 엘리베이터가 없었기 3층에서 1층까지 그 무거운 캐리어를 직접 들고 내려와야 했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스위스의 하이디 공주가 되어보자며, 어제 인터라켄에서 구입한 하이디 옷을 입혔다. 너무 오버인가 잠깐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시없을 일곱살의 스위스에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물론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내게도 특별한 기억이 될 테고. 무엇을 해도 아직은 귀여운 일곱살. 공주라는 말에 기분이 팔랑해진 아이는 제법 깜찍한 표정도 알아서 보여주었다.
기차를 갈아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스위스 철도의 힘이었다. 환승 시간도 바로바로 연결되고, 플랫폼을 넘어가는 길도 미끄럼틀 형 길이 따로 있어서 수월했다. 단지 캐리어를 들고 기차에 올라야 하는 정도가 어려울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도둑이 많다는 우려에 캐리어를 바로 옆에 바짝 붙여 두었는데 저 무거운 캐리어, 그것도 버튼 자물쇠로 채워진 캐리어를 누가 가져갈까 싶어 그냥 통로 공간 구석에 놓아두고 객실로 들어갔다. 점점 배짱이 는다.
체르마트로 가는 길은 이제까지의 풍경과는 또 달랐다. 바위산들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조금 더 거친 스위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야성적인 이탈리아와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해발 1,620m에 위치한 마을. 마테호른 아래 다닥다닥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고 예쁜 마을이었다. 이제까지의 스위스 마을들은 드문드문 여유로운 풍경을 보여주었다면 체르마트는 조금 달랐다. 거친 산속 물이 흐르는 주변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애써 발견해 그곳에 서로를 의지하며 모인 그런 느낌이었다. 느긋한 여유보다는 단단한 의지로 다가왔다.
스위스의 일곱살 하이디는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다. 눈인사, 손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귀엽다고 말을 거는 사람들 또한 많았다. 아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그런 순간순간을 즐겼다. 저 사람이 내게 "Cute"라고 한 게 맞는지 엄마에게 뭐라고 물어본 건지. 배시시 웃으며 확인을 했다.
체르마트 역 지하에 있는 무인 라커에 짐을 보관하고 먼저 점심을 먹었다. 이동 시간이 제법 걸렸기에 이미 시간은 한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한국에서 미리 알아온 체르마트 맛집, Walliserkanne를 찾았다. 어제 저녁 그린델발트의 Bebbis가 아웃백과 같은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의 느낌이었다면, Walliserkanne는 개인이 운영하는 꽤 정성을 쏟은 고급 레스토랑의 느낌이었다. 양고기 스테이크와 소고기 스테이크는 둘 다 맛있었고, 사이드 메뉴로 시킨 뢰스티 역시 아이에게 고민 없이 건넬 만큼 짠맛이 확 줄어들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체르마트는 마테호른을 위해 존재하는 마을. 이제 우리의 목적지는 마테호른을 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수네가다. 고르너그랏과 수네가 중 수네가를 택한 이유는 라이 호수에 있는 놀이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전 내내 기차를 타고 와서 또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고르너그랏이 아이에게는 힘들 수도 있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산 아래 동굴이기 때문일까. 수네가 푸니쿨라를 타러 가는 길은 유독 추웠다. 융프라우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추위였다. 날씨가 점점 흐려지기는 했지만 바깥 날씨는 후끈했음에도 말이다. 어쩌면 마테호른을 보기 위해 들뜬 마음을 잠시 식히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이 주는 여유 때문일까. 자꾸 엉뚱한 그리고 재미난 생각만 느는 기분이다.
막상 수네가에 도착하니 춥지는 않았다. 구름이 하늘 가득 드리워져 쨍한 마테호른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정수리까지 빨갛게 익혀버린 햇빛을 피할 수 있음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테호른의 뾰족한 삼각 봉우리 보다도 내 마음을 더 설레게 한 것은 고르너그랏을 기꺼이 포기하게 했던 라이 호수의 놀이터였다. 흐린 날씨로 호수에 비친 마테호른을 볼 수는 없었지만 놀이터만으로도 수네가를 찾을 이유는 충분했다.
스위스에서의 여섯 번째 놀이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다양한 놀이 기구를 갖추고 있었다. 미끄럼틀이 두 개인 것도 모자라 해먹과 나무 자동차도 있었고, 아이들이 이리저리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수로는 역대 놀이터 중 가장 길었다. 게다가 마테호른에 둘러싸여 호수를 바로 앞에 두고 있는 풍경은 만족도 백점 만점에 천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고.
우리의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정말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자연 속 놀이터를 마음껏 뛰어다녔다. 그 모습이 내 눈에만 사랑스러워 보인 것은 아니었나 보다. 외국인 가족이 와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부탁을 한 것을 보면. 너무 신나서 뛰어다니던 하이디는 넘어지기도 했지만 자연 속에서 씩씩해진 마음에 묻은 진흙을 툭툭 털고 다시 뛰었다. 그래, 이 멋진 자연 속에서 이렇게 신나는 놀이터를 앞에 두고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건 일곱살이 아니지. 어른인 나도 아이로 돌아가고 싶은데 말이다.
아이 때문에 하게 된 놀이터 순회이지만 놀이터는 내게도 즐거운 공간이었다. 아이가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고, 그 모습을 보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나를 느끼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아이가 노는 동안 나는 생각을 비우는 여유를 즐길 수 있어 이 역시 좋았고. 누군가는 그 시간이면 관광지 한 군데를 더 볼 수 있었겠다고 했지만 관광지 몇 군데 보다 더 놀이터의 시간이 나를 아이를 그리고 이 여행을 풍요롭게 했다.
마테호른이 보이는 숙소에서 마테호른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쉽게 깊어간다. 멈출 수 있다면 멈추고 싶은 순간. 모든 것이 완벽했노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들. 지금의 이 충만한 행복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꼭 다시 한번 오자. 욜로 아닌가. 맥주를 마시며 남편과 나눈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도 더 지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아직 그 행복은 내게 남아있다. 정말 많은 여행을 다녔고, 유럽도 몇 번을 다녀왔었는데 이렇게 그 행복의 여파가 오래 남는 것은 처음인 듯하다. 다녀오자마자 다시 또 같은 곳을 가고 싶은 것도 처음인 듯하고. 아마도 함께 한 사람들의 행복까지 내가 같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자연이 주는 감동이 압도적이기도 했고. 아, 스위스! 다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