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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다시 가야만 하는 곳, 피르스트를 느끼다

일곱살과 스위스 일주일

by 여유수집가

한 시간씩 늦춰지는 기상.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는 컨디션. 게다가 오늘은 날씨마저 구름 한 점이 없다. 드디어 날씨가 완전히 내 편이 된 것! 쨍한 리기를 보지 못했고, 필라투스도 오르지 못했지만 예정대로 그린델발트로 이동했다. 이미 밖은 환했고, 화창한 날씨에 마음은 급했고 루체른에서 7시 5분 기차에 올랐다. 루체른에서 인터라켄까지는 골든패스라인에 해당, 천장까지 공간을 내어준 크고 넓은 유리창 너머로 근사한 풍경들이 우리를 기다렸다.


기차를 타면 자는 것이 일상이던 나. 잠이 오지도 않았고,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숨 막히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 정말 멋지다, 진짜 최고다. 저절로 나오는 탄성과 감탄사. 기차 안에서 찍은 사진 하나하나가 모두 달력 사진이었다. 지금 이 풍경을 컴퓨터 검색이 아닌, TV의 화면이 아닌, 누구가가 찍은 사진이 아닌 내 두 눈으로 보고 있음이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인터라켄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다시 30여분을 달려 그린델발트에 도착. 이번에는 유인라커에 짐을 맡기고 피르스트로 향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제일 기대했던 곳이기도 하다. 나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피르스트로 올라가는 곤돌라 표를 구입하는 줄이 제법 길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줄은 빨리 줄어들었고, 곤돌라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가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하늘, 싱그러움 그 자체인 초록, 파란과 초록을 이어주는 갈색 지붕, 거기에 든든하게 배경이 되고 있는 알프스의 설봉들. 그리고 산뜻함을 더해주는 노란 들꼿들. 어디를 둘러보나 한 장의 엽서, 한 장의 달력이었다. 그린델발트 쿱에서 샌드위치와 초밥을 사와 그 모든 풍경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정말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았다.


모든 순간을 머릿속에 그대로 넣고 싶었다. 모든 내음을 모든 바람을 모든 햇빛을 내 오감에 닿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사진이 동영상이 모두 아쉬웠다. 아이거 북벽을 배경으로 조금이라도 더 멋진 사진을 남기겠다고 클리프워크에 올랐다. 사람들의 움직임에 흔들거릴 때마다 마음이 덜컹거렸고, 그 순간만큼을 없애 버린 아이가 쿵쿵 뛸 때마다 조심해!라는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사실 사진도 사진이지만 그곳에서 서서 두려움을 이겨내며 조금 더 가깝게 아이거 북벽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진 찍는 행렬은 그 시간을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바흐알프제로 가서 호수에 비친 알프스를 보겠다는 의지였다. 어른 걸음으로 왕복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일곱살 아이에게 무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가고 싶고, 보고 싶은 내 열망을 쉽게 꺾을 수는 없었다. 걱정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척 할 수 있다고 의지를 다지며 길을 나섰다. 아이가 끝까지 힘을 내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루체른에서는 그렇게 싫었던 '동화구출작전' 놀이도 신나게 함께 했다.


앞 서 걷던 남편이 되돌아오는 한국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남았느냐고. 저 너머냐고. 넘어서도 한참을 더 가야 한다는 말에 남편은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가보자고 우겼다. 그래, 우긴 것이 맞다. 조금씩 느려지는 아이의 발걸음에 나 역시 가능할까 의구심이 짙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로망인데 엄마의 로망인데 아이가 힘내 줄 것이라며 막연한 희망을 갖고서. 지금 이 풍경의 속살을 볼 수 없음은 너무 아쉽지 않은가.


하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잠깐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나선 길. 아이는 갑자기! 정말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응.아.가.마.렵.단.다. 이렇게 로망이 무너지는 순간. 남편은 참아야 한다고 다짐을 받으며 아이를 목마에 태웠다. 그리고 실망한 빛을 감출 수 없는 내 앞을 지나 성큼성큼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괜히 꽁한 마음으로 뒤를 따라가다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아이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다시 오면 되지 뭐. 다시 올 구실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철없는 나는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이제는 남편과 잠시 이별을 해야 할 시간. 남편은 펀패키지를 끊어 플라이어와 트로티바이크를 타기로 했고, 나와 아이는 곤돌라로 다시 내려가다 중간 정착지인 보어트에서 놀이터에 들리기로 했다. 어제 베기스에 이은 두 번째 놀이터. 1일 1놀이터의 목표 가동이다. 해발 1,600m에 위치, 아이거 북벽으로 둘러싸인 놀이터. 나무로 된 놀이기구와 함께 신나게 뛰어오는 아이들. 자연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부모들. 어느 하나 아쉬운 사람, 부족한 사람이 없었다. 이 보다 더 좋은 놀이터가 있을까. 놀이터마저 자연이고, 예술이다.


아이가 목이 말라 물을 찾을 때까지 한 시간을 조금 넘겨 놀이터에서 놀았다. 다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데 도로 올라가버린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일일권이라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고, 귀한 풍경을 한 번 더 즐길 수 있으니 아이와 함께 그저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엄마, 그때 다시 올라갔었지."라고 아가 추억하게 하는 에피소드를 남긴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만족한 시간을 보낸 우리는 쿱에서 만났다. 오늘의 숙소는 에어비앤비. 요리가 가능한 곳이기에 메뉴 역시 스위스 삼겹살로 정했다. 아이거 북벽을 안주삼아, 기름기 촉촉한 삼겹살로 배를 채우고, 시원한 맥주까지! 점심도 저녁도 최고의 만찬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 진정 최고의 날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다시 이곳으로 다시 이날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드는 피르스트.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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