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살과 스위스 일주일
찬란한 금빛 마테호른과 함께 시작한 스위스의 마지막 날. 우리의 목적지는 베른이었다. 스위스에 왔으니 수도는 들렀다 가야 하지 않을까.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것도 내 마음을 흔들었고. 사실 마지막까지 충분히 자연을 누리기 위해, 금빛 마테호른의 쨍한 모습도 더 가까이 담기 위해 고르너그랏으로 행선지를 바꿀까를 고민했으나 1일 1놀이터의 미션 완수를 위해서라도 베른에 가기로 했다.
유럽 하면 떠 오르는 중세 도시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스위스는 유럽에 왔다는 느낌보다는 자연 속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강한데 베른에서 내가 유럽에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캐리어를 끌면 참 불편하지만 짐 없이 가벼이 걸으면 올록볼록 밟히는 느낌이 재미난 유럽의 돌길. 오랜 기억들이 깨어났다. 파리의 돌길, 프라하의 돌길, 스페인의 돌길 등 오랜만에 만나는 중세 도시는 20대의 나를 불러냈다. 마음까지 20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20대와 30대. 고작 강산 한 번 바뀐 10년의 시간이지만 그 느낌은 참 다르다. 아마 내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리라. 깊은 고민보다는 과감한 도전이 더 매력 있었던 나이를 지나 이제는 돌다리도 두드려야만 하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어쩌면 이 생각도 스스로 나를 가두는 고정관념이 아닐까. 100세 시대라는데 그렇다면 이제 난 갓 1/3을 넘긴 것인데 말이다.
스위스에 오기 전 내게는 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 육아휴직을 쓸 것이냐, 말것이냐. 2011년 아이를 낳고 나는 출산휴가만 쓰고 바로 복직을 했었다. 일에 대한 욕심이 엄마에 대한 욕심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정 부모님께서 기꺼이 아이를 키워주시겠다고도 했고. 몇 번의 고비는 있었지만 친정 부모님, 시부모님, 남편의 도움으로 일에서는 당당하게 내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다. 그렇게 육아휴직 1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일곱살 아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오로지 엄마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물론 내게도. 아이의 인생에 다시없을 시간이 아닐까. 하지만 망설여졌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저 멀리 뒤처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꾸만 나를 멈칫하게 했다. 하지만 스위스는 내게 시간과 용기를 권했다. 잠시 멈춰서도 괜찮다고. 긴 인생에 정말 짧은 시간일 뿐이라고.
베른에서도 아이는 어김없이 놀이터에 들렀다. 장미공원의 놀이터였다. 유치원에서 빠르면 6시, 늦으면 7시 30분에 하원을 하는 아이. 평일에는 도무지 놀이터에 갈 시간이 없다. 주말이라고 마음껏 갈 수 있을까. 미세먼지다 뭐다 해서 놀이터 가는 일이 소원이 돼버린 아이에게 스위스는 천국이 되어주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게 되면 아이는 스위스가 아닌 서울에서도 스위스보다는 작은 놀이터이지만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이 생기리라 생각하니 조금 더 용기가 났다.
장미공원에서 곰 공원을 거쳐 운터토 다리를 지나 알레강에 발을 담그며 잠시 쉬었다가 구시가까지 걷는 길. 아이는 아빠의 손을 잡고 걷고, 나는 홀로 걸었다. 아마 남편도 내게 생각의 시간이 필요함을 눈치챘음이리라. 앞서가는 남편과 아이를 보며 용기가 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시간을 온전히 주는 것도 행복이라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를 바라보던 시간들. 내가 가고 싶은 곳 대신 아이의 행복을 지킨 것이 내게 더 큰 행복 됨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 줬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나를 채우는 시간임을 깨달았다.
베른은 그리고 스위스는 마지막으로 내게 육아휴직 고민에 대한 답을 들려줬다. 서울에 돌아가 어떻게 말을 하느냐는 또 다른 고민이지만. 말하고 말겠다는 그래서 잠시 쉬었다 가겠다는 의지를 만들어주었다. 여행은 변화를 만든다. 잊고 지냈던 꿈을 생각하게 하고, 행복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생각과 고민의 끝에서 행동을 하라고 권한다. 그래서 여행은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 된다. 단순한 추억 쌓기가 아닌 것이다.
이제,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변화가 어떤 결실을 만들어낼지. 그리고 다음 여행은 어디가 될지, 다음 여행에서 나는 어떤 변화를 만들게 될지를 말이다. 그렇게 내 여행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