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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살이 집을 마련하다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한달살이를 준비하던 어느 날

#1. 버스 정류장과 바닷가에서 가까운 집을 찾다


"진짜 없어?"

"진짜 없어!"

그래, 나는 진짜 운전면허가 없다. 자동차와 관련된 업무 경력이 있던 터라 예상 못했다는 반응, 먼 거리의 처가 가는 길에 혼자 운전을 하는 남편이 불쌍하다는 구박, 아이랑 둘이 다닐 때 불편하지 않느냐는 타박, 바보도 아닌데 운전 안 어렵다는 설득. 내게 운전을 못해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라고 왜 운전면허가 따고 싶지 않겠나.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게 다 음주운전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엄마와 동생과 함께 저녁 미사를 가던 길이었다. 택시에 내려 요금을 지불하는 엄마를 두고 나는 먼저 횡단보도를 건넜다. 손까지 번쩍 들고서. 그리고 쾅!!! 트럭의 강렬한 불빛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던 기억만 남아있다. 음주운전 차량이었다. 속력을 줄이지 않고 달려온 차에 치여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던 나는 꽤 긴 시간 의식을 잃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했다. 가벼운 타박상 외에 다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상이 없어 안도했던 사고. 하지만 내상은 남았더라. 조수석에 앉아 있어도 가까이 다가오는 차에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조금이라도 급한 브레이크에는 입 밖으로 비명이 튀어나오고, 문 위의 손잡이를 꽉 잡게 된다. 도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전면허 실기시험에 보기 좋게 낙방하며 결심했다.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식은땀이 쭉 나던 불쾌한 긴장 때문이었다.


살 길은 스스로 찾으면 된다. 제주도가 생각보다 넓고, 버스 노선이 곳곳 연결되어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다 사람 사는 곳. 찾으면 방법은 생긴다. 일곱살 아이와 함께이니 버스 한 번 정도 환승은 괜찮을 테고, 정 피곤하면 카카오 택시도 있고. 게다가 다음 지도, 네이버 지도, 구글맵까지. 헤맬 일 없도록 도와주는 어플도 있겠다. 한달살이 집에서 버스 정류장이 가까우면 되는 거다.


작년 여름, 함덕해수욕장

하지만 아직 남은 문제 하나, 짐. 제주 하면 떠오르는 바닷가 물놀이에는 제법 많은 짐이 필요하다. 구명조끼, 튜브, 큰 타월, 돗자리, 모래놀이 장난감 게다가 엄마를 위한 사치품인 캠핑체어까지. 이런 짐을 다 싸서 버스를 타고 또 물놀이가 끝나면 다시 챙겨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것.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걸어서 바다를 갈 수 있으면 되지 않겠나. 걸어서 해수욕장에 갈 수 있는 집을 찾기로 했다.



#2. 친구가 있는 집을 찾다


아침마다 오늘은 조금 늦게 와, 많이 늦게 와를 내게 묻는 딸. 늘 나와의 시간이 부족한 아이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은 연애시절 남편과 떠났던 여행만큼이나 설렌다. 부족했던 시간을 한껏 채우고, 행복한 시간들까지 담아서 아이와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단 둘이 집을 나서 느긋하게 돌아다니다 해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잠드는 시간들. 생각만 해도 몽글몽글한 기운이 마음에 퍼진다.


하지만 조금은 남는 아쉬움. 혼자만의 시간이, 어른들과의 대화가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이 역시 친구들과의 만남이 그리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단독 주택이나 빌라를 렌트하는 것은 제외하기로 했다. 따로 또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집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 가족이라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주인 가족에게 아이 또래의 친구가 있다면 더 좋겠고.


어른에게는 어른 친구, 아이에게는 아이 친구. 이 모든 것을 떠나서 긴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기도 하다. 아빠가 없는 평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아무도 없는 제주에서 나는 얼마나 당황을 할까. 비행기를 타면 서울까지 고작 1시간이지만 출발하고 싶다고 바로 출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말이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줄 수 있는 이웃. 덩그러니 혼자라는 막막함과 외로움보다 마음 한 켠의 의지처를 위해서라도 따로 또 같이의 집을 찾아야 했다.



#3. 까다로운 나를 만족시킨 집을 찾았다


누군가에게는 생소한 일이지만 제법 많이 퍼져있는 제주 한달살기. 꽤 오래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였기에 생각이 날 때마다 검색을 하고는 했었다. 남들은 어떻게 제주로 가고, 어떻게 한 달을 사는지. 그렇게 알게 된 한달살이 집. 운영자가 '아이랑 제주 한 달'이라는 책을 내기도 해서 더욱 유명한 '레이지 마마'였다. 내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갖춘 아이와 제주 한달살기 전문 숙소다.


모든 정보가 오픈된 세상. 나만의 정보가 아니었다. 유명한만큼 예약 또한 어려운 숙소. 육아휴직을 쓸까 말까를 망설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이지 마마'를 검색했다. 어머, 다음 주에 하반기 예약을 선착순으로 받는단다. 혹여 육아휴직을 쓰지 않더라도 취소가 가능하니 도전! 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하고 많은 날들 중 선착순 예약을 딱 1주일 앞둔 날 검색을 하게 되었을까. 인연 중의 인연, 운명 중의 운명이었다.


아침 9시에 선착순 카톡 접수. 조급한 마음에 8시 59분 59초에 보낸다면 탈락. 위성 시계 앱을 깔고 전날 미리 예약 문구를 적어두고 사전에 연습까지 했다. 목표 시간을 정확히 맞춰 카톡을 보내는 것. 왠지 불안했고, 꼭 선착순에 들고 싶었던 나는 굳은 의지를 담아 제법 여러 번 연습을 했었다. 선착순에 들지 못하면 육아휴직도 물거품이 될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성... 공...!!!


버스 정류장과 바닷가에서 가깝고, 아이를 동반한 여섯 집이 동시에 함께 시작하는 한 달의 일정. 까다로운 나를 만족시킨 집이 마련됐다. 거기에 여름의 마지막을 살짝 즐기며 가을이 다가오는 아름다운 제주를 만날 수 있는 9월. 생각만해도 황홀한 9월의 제주.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다. 나의 버킷리스트 실천을 위해서라도 육아휴직은 강행해야 하는 거였다. 그렇게 제주 한달살기는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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