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돌아가기 싫다" 지난 7월,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 베른의 중세 유럽 거리를 걸으며 꽤 여러 번 중얼거린 말이다. 스위스라서 그럴까. 아니다. 아이와 아홉 번을 다녀온 제주에서도 렌터카를 반납하며 늘 들었던 생각이다. 1박2일의 여행도, 7박9일의 여행도 마찬가지다. 항상 돌아가기가 싫었다. 아직 보지 못한 명소들, 여행지의 풍경 등이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가장 큰 이유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싫어서일지도 모른다.
5시30분 알람이 울린다. 한 번에 잘 일어나지 못해 몇 번을 미루고 나면 6시는 마지노선. 늦어도 6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아이 유치원 가방과 입고 갈 옷을 챙긴다. 오늘은 2명이 먹게 될까 3명이 먹게 될까를 고민하며 쌀을 씻어 저녁밥 예약 취사를 하고, 아이 아침밥을 챙기고 나면 이제는 내 차례. 후다닥 씻고, 젖은 머리의 물기만 겨우 말린다. 회사 가는 길에 다 마르겠지. 색조화장은 무슨! 선크림까지만 바른다. 7시에 일어난 아이와 잠깐 인사를 나눈 뒤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아침만 이렇게 정신이 없을까. 회사에 도착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 사내 커뮤니케이션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나는 고민하고, 찾아보고, 읽고, 쓰고, 물어보고, 수정하고, 협의하고, 회의하고 하는 일들을 반복한다. 더러는 출장도, 촬영도, 편집도 하게 되고. 업무의 속도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시간은 나를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붙잡아 두는 일이 많다. 바쁘다는 말이 당연한 일상이다.
여행은 일상과 정 반대 지점에 있다. 바쁨 대신 여유를 건네고, 모니터 대신 자연을 보게 한다. 생각의 중심도 회사에서 나로 옮겨주고, 아이를 향하는 시선에도 조급함보다 느긋함을 보탠다. 그 반대의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더욱 격렬히 돌아오기 싫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가만 생각해보면 돌아오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21살의 배낭여행, 한 달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도시 파리에서였다. 딱딱한 바케트 빵에 요거트를 찍어 먹던 일상. 든든한 집밥이 그리웠다. 당시 파리의 민박집에서는 짜파게티와 신라면을 무한 제공했는데 이걸 먹겠다며 베르사유 궁전도 에펠탑 야경도 포기하고 민박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여행을 마친 뒤에도 하루 종일 뒹굴거릴 수 있는 대학생. 여행이나 여행 후나 여유가 보장된 일상이라 저항 없이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2005년 입사 이후 처음으로 긴 휴식을 갖는다. 무려 277일이다. 육아휴직을 쓰게 된 것이다. 갓난쟁이와 함께 였다면 육아휴직이 아닌 육아전쟁이었을 텐데 일곱살과 함께이다 보니 육아휴직은 휴식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육아휴직의 시작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했다. 일상과 여행으로 양분됐던 삶에서 여행 같은 일상이 '짠'하고 나타나는 것. 처음 겪는 일이라 어색할 것 같았다. 자칫하면 흐지부지 아깝게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들. 무언가 전환점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돌아오고 싶어 지는 여행은 어떨까. 아쉽게 말고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여행. 거기에 돌아와도 여유가 기다리고 있고. 여행에서 앞으로 주어질 여행 같은 일상을 계획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언제든 꼭 한 달을 살아봐야지 했던 제주를 휴직하자마자 가겠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런 마음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 오늘부터 회사 안 가지' 천천히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는 일상으로 채우지 않겠다는 다짐인 거다.
제주 한달살기는 내게 여러 가지 의미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제주에서 내가 너무 좋아하는 풍경들을 지겹도록 바라보는 시간, 아이랑 더 단단한 관계를 만드는 시간, 천천히 나를 돌아보며 277일 그리고 더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 느릿하게 사는 방법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내가 느긋하니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나는 제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