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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차, 태초의 제주를 만나다 - 삼성혈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시간은 너무 빠르다. 바로 어제 시작한 제주에서의 한 달이 벌써 끝자락에 와 있다. 아직도 가고 싶은 곳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 소중해서 애틋한 시간, 한 번 더 과감한 도전을 하기로 한다. 다시 한번 동쪽 여행이다. 제주에 올 때마다 가고 싶었는데 올 때마다 인연이 닿지 않았던 제주돌문화공원이 오늘의 목적지다.


아침부터 날이 흐리다.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강수확률은 30%다. 70%의 확률을 믿고, 목적지를 향한다. 제주시내로 진입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곧 그치겠지, 지나가는 비일거야 생각하지만 빗방울이 제법 굵다. 방수가 되는 바람막이는 가방에 있는데 우산은 따로 없다. 돌문화공원은 야외도 많이 걸어야 하는데 비가 더 거세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20170920_131157.jpg 옆에 있는 돌하르방을 흉내내는 하이디

비가 그칠 것이라 기대하고 돌문화공원으로 간다, 비가 그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목적지를 변경한다. 아무 걱정 없는 하이디는 비가 창문을 두드린다며 신나 하고, 내 머리 속만 복잡하다. 앞으로의 가능성보다는 현재를 믿기로 했다. 지금 우리는 이 순간을 즐기는 여행을 하고 있으니까. 비가 오면 가야 할 후보지로 생각해두었던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으로 간다.


전통적인 박물관답게 제주 형성과정과 자연의 변천 과정, 옛 제주인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전시해두었다. 사실 하이디가 딱히 흥미 있어할 주제는 아니었다. 이럴 때는 엄마의 양념이 필요하다. "하이디, 여기 봐~ 엄마 노루랑 아기 노루인가 봐." 신기함을 가득 담아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거다. 대체 엄마는 뭐 때문에 저렇게 놀랐을까. 다행히 하이디는 엄마의 손 끝을 따라 움직인다.


처음 몇 번은 엄마 반응에 관심을 보이지만 결국 별 것 없음을 알게 되면 하이디의 무시가 시작된다. "안 봐도 괜찮아." 이제는 다른 양념이 필요할 때. "하이디, 저 새가 너를 부르는데. 물속에 보물이 있다고 찾아보라는 거 아닐까?", "저 새는 공주가 변해서 된 걸 지도 몰라.", "저 물고기는 인어공주에서 본 물고기 같아."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 엄마는 지쳐 하이디를 가만 내버려 둔다.


어떤 전시는 자세히 들여다보고 어떤 전시는 달리며 스쳐가는 하이디. 그 기준은 모르겠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느끼는 대로 보는 자유를 허락한다. 그리고 더 이상 꾸며내지 않아도 되는 나는 남은 에너지를 내가 전시를 관람하는데 쓴다. 빨리오라며 재촉하는 하이디에게 말한다. "엄마는 엄마 보고 싶은 것 천천히 볼 거야. 하이디가 기다려줘." 아이만을 위한 여행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엄마와 아이 모두를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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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가 이 박물관을 방문 리스트에 넣게 만든 공간이 나왔다. 체험관이다.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하이디의 관심을 끌기는 충분했다. 제주 옛 화장실인 돗통시를 체험하더니 왜 돼지가 화장실에 사는지, 왜 돼지는 인분(하이디의 표현은 '똥')을 먹는지 물어본다. 같이 안내판의 설명을 읽는다. 물을 길어 나르는 물허벅을 메고는 무거워 휘청거리더니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를 묻는다. "색깔이 참 예쁘다." 갈옷을 입어본 하이디의 말이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천방지축 일곱살이 세 가지나 알고 가는 박물관 관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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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나서니 비가 그쳐 있었다. 박물관과 연결되어 있는 신산공원으로 간다. 놀이터 때문이다. 미끄럼틀이 젖어있다며 투덜거리면서도 하이디는 떠날 생각이 없다. 기차 모형 공간에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로 놀이터를 평정한다. 하지만 놀이터 독차지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못했다. 하교한 중학생 남자아이들 무리가 미끄럼틀을 내 집 삼아 스마트폰 게임 삼매경의 빠진 탓이었다.


아쉬워하는 하이디를 달래 바로 근처의 삼성혈을 찾는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제일 처음 만난 전시가 설문대할망 애니메이션 관람이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알게 된 탐라개국신화 현장을 찾은 거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주의 옛 모습을 알아가는 여행이 계속 이어진다. 여기서도 탐라개국신화 3D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이디가 말했다. "제주도는 세 명의 왕자가 만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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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뿌리를 볼 수 있어 좋았지만 그보다 숲을 걸을 수 있어 더 좋았다. 도심 한가운데 키가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세 개의 돌무더기, 세 개의 구멍. 세 명의 왕자. 왜 하필 숫자 3일까.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는 것처럼 2+1인 3은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완전한 수라고 했던. 제주는 완전함에서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 완전함은 이 나무 안에서 보호받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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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주는 평안을 마음 가득 채우며 느긋하게 걷는다. 제주 목관아까지 둘러볼까 하는 조바심을 접었다. 지금 이 순간의 평온을 충만하게 누리기로 한다. 많은 곳을 보는 것보다 한 곳이라도 충분하게 느끼는 것이 더 큰 울림으로 기억됨을 제주한달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어제를 마지막으로 하이디는 돌아가는 날까지 그림일기를 쓰지 않았다.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늦은 밤까지 엄마들과 친구들의 파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뚜벅이 이동 경로>

1) 레이지마마(곽지모물) > 202(배차간격 15~20분) > 제주버스터미널 > 335-1(배차간격 20분,

다른 번호 버스 3대 가능)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2)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 도보 > 신산공원 > 도보 > 삼성혈

3) 삼성혈 > 도보 > 삼성초등학교 정류장 330-2 (배차간격 15~20분, 다른 번호 버스 2대 가능) > 동산교

> 202(배차간격 15~20분) > 레이지마마(곽지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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