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일요일부터 약속된 일이었다. 다시 새별오름에 가서 정상에 오르기. 오히려 하루가 늦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날씨가 도와주지를 않는다. 찝찝하게 뿌연 하늘. 미세먼지 앱을 확인하니 빨간 얼굴이 나를 협박한다. 외출을 삼가하라며! 망설였다. 실내 박물관을 찾아야 하나.
하이디는 아침을 먹자마자 마당으로 나간다. 친구 찾아 삼만리다. "친구들 목소리 들린다. 나가도 되지?" 말릴 틈도 없다. 집을 나서는 하이디를 보며 새별오름에 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 곳에 머물며 아이를 좁은 방안에만 가둬둘 수도 없고, 실내 박물관을 가더라도 오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될 공기였다.
일요일에 이미 버스 정류장에서 새별오름 입구까지 제법 거리가 먼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하이디가 다리를 다친 그 길을 꼭 다시 걸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택시로 새별오름을 찾았다. 기사님이 묻는다. 무슨 축제가 있냐고. 입구 주차장부터 안쪽 주차장까지 푸드트럭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한 대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출발 전 점심 식사가 걱정돼 인스타그램에서 '새별오름 푸드트럭'을 검색한 결과였다. 하지만 무려 다섯대다. 오름을 빼면 딱히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했다. 어쩌면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푸드트럭을 찾아다니는 것도 제주를 여행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새별오름이 이효리 덕분에 정말 핫한 관광지가 된 것일 수도 있고.
주차장을 등지고 새별오름을 바라보면 두 가지 길이 나온다. 왼쪽 가파른 길, 오른쪽 완만한 길.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올라가 왼쪽으로 내려오라고 했다. 하지만 하이디랑 함께인 내 생각은 달랐다. 가파른 길을 내려오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다.
왼쪽 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길은 훨씬 가팔랐다. 미끄러질 것 같다며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던 하이디에게 역할놀이 당근을 쥐어줬다. 쉴 때는 역할놀이도 쉬고 올라갈 때는 역할놀이를 신나게 하기로 했다. 세 번 정도 멈춰 서야 했지만 하이디는 씩씩하게 잘 올랐다. 오르는 길에 만난 이모, 삼촌들의 칭찬도 또 다른 당근이었다. "대단하다!" "나도 힘든데 너 정말 잘 오른다." "진짜 씩씩하네!"
선명하니 맑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좋았다. 내려다 보이는 짙은 초록은 뿌연 하늘을 잊게 했고, 중간중간 모습을 드러낸 억새는 가을이 곁에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게다가 올랐다는 뿌듯함과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이 보태져 새별오름을 더 특별하게 느끼도록 했다.
한 시간 남짓의 오름 등반. 이제 허기진 배를 채울 차례다. 푸드트럭 순회 결과, 하이디의 선택은 쿠바 샌드위치였다. 가방에 든 돗자리를 꺼낸 하이디. 푸드트럭을 즐기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다. 돗자리에 앉아 샌드위치와 감자튀김을 먹는다. 하이디도 함께 먹기 위해 할라피뇨를 뺐음에도 맛있다.
새별오름을 마음껏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을 돗자리에 앉아 먹는 낭만적인 순간에 또 다른 낭만이 찾아든다. 무료로 사진을 찍어주겠단다. 우리가 선택한 푸드트럭과 연계된 이벤트라고 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진 찍기 참 힘든 모델, 하이디가 먼저 찍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엽서를 만들면 4,000원인데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내가 먼저 물었다. 육지 사람의 생각인데 왜 이렇게 무료로 찍어주시냐고. 사진작가는 대답한다. 엽서를 만들면 좋을 텐데 대부분이 만들지를 않는다며, 그 돈이 생활비가 되는데 쉽지는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그럼 됐죠." 사진을 찍어주는 작가의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새별오름을 뒤로한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테디베어포테지움이었다. 하이디가 지도에서 직접 선택한 관광지였다. 사실 어릴 적 이미 다녀온 곳이었다. 그때는 울기 바쁘고, 나가자고 하기 바빠서 괜히 왔다 돈 아깝다 생각했던 곳이었다. 썩 내키지는 않은 재방문이지만 하이디의 선택에 따랐다.
몇 년 전과 똑같은 전시이지만 하이디가 달라졌다. 네 살에서 일곱살이 됐고, 부모가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찾아왔다. 두 가지 변화가 다른 결과를 만들었다. 빨리 나가고 싶던 테지움이 나가기 싫은 테지움이 됐다. 1층 테디베어 동물원에서 하이디는 엄마가 되어 동물들을 소개시켜줬다. 팬더는 무엇을 먹어요? 원숭이랑 비슷한 다른 동물은 뭐가 있어요? 아이가 된 엄마의 질문에도 척척 대답한다.
2층은 스토리가 더해진 테마전시다. 달라진 전시 내용에 맞춰 관람법도 달라진다. 직접 스토리 속으로 들어간다. 테디베어 공주들과 함께 하이디 역시 공주가 되어 무도회에 초대받기도 하고, 왕자님께 프로포즈를 받기도 한다. 이야기는 끝이 없는 것처럼 모든 공간은 한 번 둘러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무도회에서 차를 마시는 놀이를 하며 한 번 둘러봤다면 춤을 추는 역할을 하며 한 번 더 둘러봐야 한다. 춤도 우아한 발레를 추었다가 재미있는 게다리 춤도 추어야 한다. 프로포즈도 Yes라고 대답했다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대답을 한다. 재미있는 상황이 계속 더해진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평일 낮이고 보고 또 보는 관객은 우리뿐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 아니기도 했다. 오랜만의 등산 아닌 등산으로 이미 지친 내가 에너지 넘치는 아이에 맞춰 박물관을 돌고 또 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집에 가는 길에 뽀로로 음료수를 사주겠다고 꼬시지 않았다면 아마 문을 닫을 때까지 보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여행 기간 동안 가급적 몸에 나쁜 음식은 멀리해야지 결심했다. 사탕, 젤리, 초콜릿, 음료수도 포함된 계획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이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나쁜 음식 사주기였다. 사준다고 약속하고 하이디가 내 말을 들을 때는 좋았다가도 사주는 순간부터 후회를 했다.
편한 방법을 너무 쉽게 선택하는 내게 실망했다. 자주는 아닌데 그럴 수도 있다고 다독였다. 아이를 차분히 설득시키지 않았다며 나를 탓했다. 작은 것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자고 합리화했다. 부족한 엄마였다가 아니었다가 갈팡질팡하는 마음은 여행 시작부터 여행이 끝나가는 순간까지 반복됐다. 사실 여행에서만 그랬겠나. 내가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순간부터 시작된 갈등일 게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 반복일 테고.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테지움 박물관
일기설명: 오늘은 테지움 go go! 했다. 동물 보는 게 젤 재미있었다. 라이언 봤고, 야옹이 봤고, 토끼 봤고 엄마 놀이했다.
좀 더 길게 풍부하게 써줬으면 하는 아쉬움을 버릴 수는 없지만
go go라는 표현도 쓰고, 웃음 표시도 그리고.
새로운 표현 등장에 만족하는 것으로!
어쩌면 육아는 기대를 내려놓는 연습 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늘 엄마의 바람대로 행동하거나 자라지 않으니 말이다.
<뚜벅이 이동 경로>
1) 레이지마마(곽지모물) > 택시 > 새별오름
2) 새별오름 > 택시 > 테디베어포테지움
3) 테디베어포테지움 > 250-2(250번 라인은 모두 해당되나 배차간격은 30분) > 월산마을
> 270 (배차간격 30~40분) > 고내리 > 202(배차간격 15~20분) > 레이지마마(곽지모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