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분명 어제는 오늘 다시 새별오름을 가자고 했던 하이디였다. 갑작스레 파인 길에 놀랐고, 아팠던 기억이 쉽게 잊혀질리가 없다. 아침에 다시 물으니 주저주저한다. 나 역시 어제를 생각하면 아직 가슴이 떨렸기에 진정할 시간이 하루는 더 필요했다. 그렇다고 집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태풍이 지나간 제주의 날씨가 우리를 밖으로 밀어냈다.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서쪽에 머무는 뚜벅이 신세라 동쪽은 감히 쳐다보지 않았었다. 주말아빠가 있을 때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많은데 뭐가 두려우랴. 그깟 한계를 넘어서기로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에코랜드다. 에코랜드는 하이디가 세살 때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첫 번째 정차역만 둘러보고 나머지 역은 모두 지나쳤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애월리에 가서 급행버스로 갈아타고, 제주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에코랜드까지 가기로 했다. 에코랜드까지 버스를 타고 가기는 이동 시간이 너무 길고, 버스정류장에서 에코랜드까지 걸어갈 길이 지도에서 확인되는 것보다 멀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 택시를 섞은 일정이었다.
택시 기사님이 물으신다. 에코랜드에서 몇 시쯤 나와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시느냐고. 한달을 머물고 있어 시간이 많아 딱히 몇 시에 나와야겠다는 계획도 없고, 시간이 되면 건너편 돌문화공원에 갈 예정이라고 답하니 대화의 주제는 옮겨간다. 초등학생 자녀들이 있으시다며 제주는 아이들 키우기는 너무 좋다고 하신다. 한달 머물다 좋으면 아예 살러오란다. 머물수록 더 좋아지고 있는데 살러오는 용기를 과연 내가 가질 수 있을까.
에코랜드에 도착한 시각은 11시38분. 점심 먹는 시간을 포함해 넉넉하게 3시쯤 에코랜드를 나서서 돌문화공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계획은 늘 계획일 뿐이다. 이날 우리가 에코랜드를 나선 시각은 17시36분. 무려 여섯 시간을 머물렀다. 하지만 하이디에게는 그 여섯 시간도 부족했다. 더 놀고 싶다며 버티는데 곧 문을 닫는다며 사정을 해야만 했다.
누군가는 자연에 너무 인공미를 보태 불만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그래도 곶자왈을 기차라는 수단으로 편하게 둘러볼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하이디가 물었다. 에코랜드의 뜻이 뭐냐고. 자연을 가꾼 땅이라고 대답하며 생각한다. 자연을 가꾼 것이 맞을까. 자연을 훼손한 것이 맞을까. 편리한 것에 빨리 적응하기 마련인 사람이기에 편하니 좋다고 생각하려는데 호숫가에 호텔을 건축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욕심을 냈으면 좋았을 텐데 한 발 더 나아가는 모습이 씁쓸했다.
여섯시간 중 절반을 머물렀던 곳이 피크닉가든역의 에코로드였다. 에코로드는 화산송이로 포장된 생태탐방로로 곶자왈의 일부였다. 400m의 짧은 코스와 1.9km의 긴 코스로 나눠지는데 당연히 우리는 긴 코스를 택했다. 오늘도 여전히 반복되는 역할놀이. 요즘 보니하니에 푹 빠진 하이디는 하이디와 보니하니가 숲 탐험을 왔다는 상황으로 내게 보니하니를 하라고 한다. 하이디에게 늘 끌려가는 엄마가 오늘은 꾀를 낸다. 숲 탐험 미션으로 노래 부르기도 하고, 나무 이름 맞추기를 넣어 나무 이름을 살펴보기도 한다.
중간 즈음에 다다르니 화산송이 맨발체험장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가 놓여있다. 동글동글 작은 화산재 알갱이. 자신 있게 신발을 벗고 발을 내딛는다. 세 발째 하이디는 포기하고 의자에 앉는다. 그래도 나는 엄마인데 조금 더 걸어본다. 아얏 아얏 비명 소리가 저절로 나오지만 발바닥이 깨어나는 느낌이 든다. 아프지만 살아있는 그 느낌이 좋아한 발 더 한 발 더 내딛는다.
다시 하이디와 나란히 의자에 누웠다. 시선은 푸른 나무에 닿는다. 아이유의 가을아침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음악은 하이디가 선곡한 프리파라 OST다. 프리파라 OST여도 괜찮다. 음악에 푹 빠진 하이디가 가만 나를 내버려둔다. 덕분에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가만히 바라본다. 바람의 움직임이 내 눈에 그려진다. 거친 까마귀 소리가 지나가고 나면 경쾌한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린다. 바람을 보내고 바람을 부르는 소리 같다. 그렇게 한동안 각자의 세계에 머물렀다.
다시 걷는다. 곳곳에 시를 전시해뒀다. 처음에는 인공적인 조형물이 눈에 거슬렸는데 하이디가 앞에 서서 읽기 시작하니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의 기분을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울 나이. 지금 읽고 있는 시가 두리뭉실한 마음을 언어로 그려내지 않을까 엄마다운 생각이 들었다. 어떤 느낌인지 묻지는 않기로 했다. 꼭 아이가 느끼지 못해도 괜찮았다. 맑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시가 내 마음에 닿았으니 충분했다. 옆에서 같이 듣고 있던 한 남자분이 말씀하신다. "참 좋다. 고맙다."
에코로드를 업어달라 조르지 않고 끝까지 걷게 한 동력은 키즈타운이었다. 에코로드를 다 걸어야 키즈타운에 입장할 수 있다는 엄마의 거짓말이 통했다. 이미 엄마는 지쳤는데 키즈타운에서 하이디는 다시 살아난다. 지금까지는 어서 가자 재촉 한 번 없이 하이디가 흙을 만지면 만지는대로 쉬겠다면 쉬는 대로 내버려두었는데 이제는 재촉을 하게 된다. 한정된 공간에 넘쳐나는 아이들과 서로 먼저라는 욕심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체념을 하고 벤치에 앉아있으니 혼자서는 심심해진 하이디가 다가온다. 공연장 가는 놀이 한 번만 더 하고 가잖다.
드디어 마지막 '라벤더, 그린티&로즈가든역'이다. 하이디가 꽃에 얼마나 관심이 있을까 한 번 쓱 보고 빨리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칭찬이 발길을 잡는다. 50대 초반 정도 친구 사이로 보이는 네 분의 관광객들이 하이디를 보고 이야기하신다. "꽃보다 니가 더 멋지다." "정말 그렇네!" 사진을 찍지 말라고 우기던 하이디는 다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고, 저 끝까지 가보겠다고 한다. 칭찬이 야속해지는 순간이다.
애월리에 도착하니 7시30분이되었다. 퇴근 시간과 겹쳐 시내에서 많이 밀린 탓이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가려고 찜 해둔 식당을 찾았다. 불이 꺼져있다. 월요일이 휴무다. 이런, 제주 식당들은 늦게까지 하지 않는 곳이 많은데 마음이 급해진다. 다행히 작은 식당 하나가 붉을 밝혔다. 게다가 맛있기까지 하다. 단촐하지만 정성스런 밥상이 참 고마웠다. 하이디도 거진 한 공기 가까이를 먹는다.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지친 마음은 모두 사라지고, 긴 나들이 길도 모든 게 다 좋았다로 마무리된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그림설명: 에코랜드에 간 엄마와 하이디
일기설명: 오늘은 에코랜드에 갔다. 키즈타운이 제일 재미있었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 누워서 음악 듣기 하는 게 제일 재미있었다~ 숲속탐험은! 재미가 있었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로 일기를 끝낸 하이디에게
엄마가 말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없었어?
그렇게 일기는 조금 더 늘어났다. . .
<뚜벅이 이동 경로>
1) 레이지마마(곽지모물) > 202(배차간격 15~20분) > 애월환승정류장(애월리) > 102(배차간격 40분)
> 제주시외버스터미널 > 택시 > 에코랜드
2) 에코랜드 > 택시 > 제주시외버스터미널 > 102 > 애월환승정류장(애월리) > 저녁식사
> 202 > 레이지마마(곽지모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