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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차, 오르지 못한 오름 - 오라동메밀밭, 새별오름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어둠 속에서 만난 바다를 밝은 빛 아래서 다시 보기로 했다. 아직 구름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한담해안산책로를 걸었다. 하이디와 한 번 걸었던 길, 두 번째라도 좋았다. 어머니와 아빠라는 새로운 길동무가 생겼고, 어젯밤의 거센 파도소리가 귓가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넓고, 가보지 못한 곳은 많기에 되도록이면 새로운 곳을 가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한다. 글쎄. 물론 새로운 곳이 주는 설렘이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더 강한 기억을 남기기는 한다. 하지만 같은 곳을 또 간다고 해도 같이 가는 사람, 그날의 날씨, 이전의 내 경험과 그날의 마음 상태 등등 무엇하나 같은 것이 없기에 장소는 같지만 새로운 기억이 덮인다. 그래서 그곳에 대한 마음은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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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해안산책로도 그랬다. 아빠는 높은 바위 위를 거침없이 오른다. 혼자 오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손을, 하이디의 손을 잡는다. 산책로에서만 보던 바다를 바위 위에서도 보게 된다. 하이디랑 역할 놀이하고, 노래 부르고, 이야기하느라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던 시간들. 아빠와 할머니께 하이디를 맡기고 사색의 시간을 누리기도 한다. 똑같은 길이 더 이상 같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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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다시 길에 나오니 구름이 점점 걷히고 있다. 점점 환해지는 하늘. 구름이 물러가는 모습도 하나의 근사한 풍경이 된다. 우리가 애정 하는 카페, '지금 이 순간'에서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바다를 두 눈에 담는다. 한담해안은 한 달의 시간 동안 정말 다양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쨍한 바다, 흐린 하늘 아래 바다, 해가 지는 바다, 태풍 속의 바다, 이제는 태풍이 물러가는 바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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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함께한 2박 3일 일정의 마지막 드디어 해가 났다. 놓칠 수 없는 순간. 오라동 메밀꽃 축제를 찾았다. 이 시기의 제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풍경이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으로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온 한 구절이 생각났다. 달빛이 아닌 햇빛 아래서도 반짝반짝 소금빛을 드러내는 메밀꽃. 꼭 내 눈에는 소복하게 내린 싸락눈 같았다. 어쩌면 드라마 도깨비의 흩날리던 메밀꽃 장면과 겹쳐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20170917_143049.jpg 개구리 뒷모습 포즈를 한 하이디
20170917_144400.jpg 나랑 해녀 동상이랑 똑같죠?
20170917_144051.jpg 제 연주 좀 들어보실래요?

아침까지는 태풍으로 짙은 구름 가득한 하늘이었는데 이제는 뜨거운 태양에 눈이 부실 정도다. 거기에 하얀 메밀꽃은 빛을 반사해 반짝거린다. 오랜만에 만난 햇빛의 반가움과 메밀꽃의 환상적인 풍경이 겹쳐 들뜬 마음에 연신 사진을 찍는다. 뒤로는 오름, 앞으로는 제주시까지 보이니 모든 제주를 다 가진 기분이 든다.


어머니와 남편은 공항으로 떠나고 다시 하이디와 단 둘이 남은 순간. 갑자기 좋아진 날씨에 그냥 숙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새별오름으로 향한다. 주말 내내 아빠 차로 편히 다녔으니 이번에는 버스다. 정류장에서 새별오름 입구까지 그렇게 멀 줄 몰랐다. 다음 지도에 따르면 정류장에서 새별오름까지는 34분. 지표 표시로 도착지는 오름 정상, 오름에 오르는 시간까지 포함된 듯했다. 정류장에서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길을 조금 헤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34분은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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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도 끝이 있다. 드디어 오름 입구가 보인다. 바로 앞의 주차장만 지나면 된다. 혹시 하이디가 지칠까. 하고 싶어 하는 역할놀이를 신나게 같이 하며 손 꼭 잡고 걸어왔다. 새별오름 등산로 앞까지 딱 5분. 앗, 손이 쑥 내려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이디의 비명. 길 중간이 깊게 파인 거다. 그리고 거기에 빠진 하이디의 발! 빠지면서 하이디의 다리가 쓸려 살이 파였다. 펑펑 우는 하이디.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일단 아이를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꼭 끌어안고 괜찮다며 등을 다독였다. 그리고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도착지, 제주대학병원으로.


바닥을 좀 더 살폈어야 했는데 왜 아이 발 빠질 딱 그 정도 작은 구멍으로 길이 파였까. 버스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리가 부었고, 하이디의 울음소리로 봐서는 아무래도 응급실에 가야 할 것 같았다. 택시에 오르니 기사님이 물으신다. 응급실을 가시는 거냐고. 사정을 말씀드리니 아이들 다리가 그렇게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며 하이디에게 다리를 움직여 보라고 하신다. 울음을 그친 하이디는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아프지 않다고 한다. 다시 목적지 변경,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약국으로 갔다.


약국에 도착하자마자 하이디는 약국 장난감을 구경하겠다며 뛰어다닌다. 약사님께 응급실에 가려했는데 어떠냐고 말씀드리니 저기 뛰어다니는 것 보라고 하시며 하이디를 불러 상태를 살피신다. 메디폼이면 되겠단다. 안도의 한숨. 다행이었다. 꼼꼼하게 메디폼 사용법을 듣고 하디이가 고른 약국 장난감을 하나 사서 택시로 집에 돌아왔다. 새별오름은 우리와 인연이 아닌 걸까. 엄마가 너무 욕심을 내는 걸까. 복잡한 마음에 시무룩한 나를 보고 하이디가 말한다. "엄마, 내일 다시 새별오름 가자!"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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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없음

일기설명: 오늘 빵집에서 빵 샀다. 너무 고마웠다. 다음에 또 와야겠다.



점점 일기쓰기가 싫은 일곱살.

게다가 오늘은 다리를 다치기까지.


다리를 다쳤을 때 기분을 써보면 어떨까 물었더니

그 이야기는 쓰기 싫다며

아빠와 할머니가 공항 가기 직전에 들린 빵집 이야기를 썼다.


억지로라도 일기를 길게 쓰게 해야 맞는 것일까.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까.

고민이 되는 시간이다.




<뚜벅이 이동 경로>

1) 한담공원, 오라동 메밀밭은 주말아빠의 차로 이동

2) 노형오거리 > 250-3(250번 라인은 모두 해당되나 배차간격은 30분) > 화전마을 > 도보 > 새별오름

3) 새별오름 > 택시 > 노형오거리 > 택시 > 레이지마마(곽지모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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