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어제 카멜리아힐의 조금 빗나간 판단을 만회하고자 오늘의 첫 목적지는 오래된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하늘을 가리는 비자림이다. 빽빽한 비자나무가 바람도 비도 막아주는 곳, 이미 비 오는 날 두 번을 걸었던 곳이라 태풍의 한가운데서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애월의 서쪽에서 비자림이 있는 동쪽으로 넘어가는 길, 어제보다 하늘은 더 낮게 깔린다. 거기에 하나 둘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빗방울의 크기가 마음의 불안을 키운다. 거기에 차가 흔들리는 느낌까지 든다. 바람이 무섭다.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가이드의 복잡한 마음을 남편이 잠재운다. 실내로 가야겠다.
제주 동부권 실내 관광지로 '선녀와 나무꾼'을 찾아뒀다. 제주도를 10번 찾은 우리도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70년대 80년대 삶을 재현해둬 어르신 관광객들이 좋아한다는 평이 영향을 미쳤다. 급작스런 방향 선회라 인터넷으로 미리 할인 예매권도 구매해두지 못해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태풍을 피해 안전하고 즐겁게 여행하는 것이 우선이니까.
여행 후기는 개인적인 견해다. 꼭 그 후기에 갇힐 필요는 없다. '선녀와 나무꾼'도 마찬가지였다. 어르신들이 좋아한다는 후기가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일곱살이 제일 좋아했다. 예전 장난감 전시물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다. 정말 엄마가 가지고 놀았냐면서. 재미있었겠다면서. 오히려 어머니께서는 실내 전시다 보니 날 수밖에 없는 쾌쾌한 냄새와 어두운 조명, 많은 사람에 살짝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다.
생각보다 전시물은 많아서 끝날 듯 끝날 듯 쉽게 끝나지 않았다. 손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어머니는 마지막이 다 돼서야 머리가 아프다는 말씀을 하셨고, 우리는 일곱살의 보폭과 시선에 맞춰 전시를 모두 구경할 수 있었다. 특히 어린이와 노약자의 출입을 금하는 귀신의 집도 도전한 하이디였다. 할머니도 엄마도 말렸는데 스스로 해보겠단다. 다행히 구식이다 보니 한 발 늦은 비명소리와 한 발 늦은 바람과 귀신의 등장에 생각보다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물론 다시 또 들어가지는 않겠다고 했지만.
빗방울이 오락가락하고, 바람은 거세고, 어머니는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쉬었다가 다시 나가기로 했다. 하이디도 어제부터 레이지 마마 친구들과 놀지 못해 레이지 마마에 가고 싶다고 했고.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하이디를 제외하고 모두 낮잠 시간을 가졌다. 하이디는 뒹굴뒹굴 방에서 책을 보다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자 쪼르르 친구들을 찾아 떠났고.
어둠이 내린 바다. 무섭게 몰아치는 파도. 그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파도 소리가 운명 교향곡처럼 들렸다. 쪼르르 벤치에 앉아 있는 어른들을 두고, 하이디가 이리저리 뛰어다니자 어머니는 파도가 삼킬 것 같다고 옆에 오라고 하시면서도 쉽게 자리를 뜨지 않으셨다. 언제 어디서 이런 파도소리를 들어보시겠냐며. 검고 거센 바다가 무서웠지만 그 소리만큼은 마음을 붙잡았다. 태풍이 만드는 극적인 순간이 더 환상적이었다.
태풍의 캄캄한 밤이지만 바다의 황홀한 여운이 남아 그냥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선운정사로 향했다. 이 좁은 길 끝에 절이 정말 있는 것일까.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한참을 달렸다. 캄캄한 밤 한가운데 반짝이는 절. 크고 웅장했다면 오히려 어색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길 끝 어둠 속 반가운 존재는 소박한 화려함으로 아늑하게 우리를 맞았다.
여기서도 태풍은 어김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하늘을 가린 등이 바람에 정신없이 흔들린다. 누군가의 안녕을 위해 떨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아릿하다. 앞서 걸어가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하느님께 기도를 한다. 태풍의 한가운데서도 평온한 이 순간처럼 앞으로도 우리 가족이 안녕할 수 있기를 청한다.
<일곱살 하이디의 일기>
아빠가 제주에 온 날은 자연스레 일기를 쓰지 않는 하이디; 오늘도 휴재!
<뚜벅이 이동 경로>
오늘은 주말아빠덕분에 뚜벅이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