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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차, 할머니와 함께 - 정방폭포, 카멜리아힐

뚜벅이 엄마랑 제주한달

by 여유수집가

작년 12월, 시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가셨다. 너무나 갑작스런 이별이었다. 분명 한 번은 겪어야 할 이별이지만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었다. 유독 하이디를 예뻐하셨기에 하이디와 더 많은 추억을 만들어드리지 못했음이 마음 아팠다. 너무 아프게 배운 거지만 혼자 남으신 어머니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생각을 했다. 가서 좋으면 아예 살아도 된다며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하신 어머니를 제주에 초대했다.


다들 한 달이 생각보다 짧다고 아이랑 둘이서만 즐기기도 부족한 시간이라고 했다. 게다가 친정 부모님도 아닌 시어머니라니 불편하겠다고 했다. 이왕 오시라고 한 것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만 손해, 즐거운 추억을 남기셨으면 했다. 매일 다음 날 일정만 고민하다가 처음으로 2박 3일의 일정표를 만들었다. 날씨가 좋으면 더 좋을 텐데 태풍 예보가 있어서 비올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한 일정이었다.


바람소리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태풍주의보 발령 문자까지 왔다. 비행기가 제대로 착륙할 수 있을까. 나뿐만이 아닌 주변 여기저기서도 걱정이다. 하늘의 바람은 생각보다 잠잠했던 것일까. 비행기 기술이 좋아진 것일까. 지연 없이 남편과 어머니는 무사히 제주에 도착했다. 바람만 거샜지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더운 것보다 낫다는 어머니와 제대로 제주의 바람을 느끼며 관광객 모드로 변신했다.


평소 체력이 그리 좋지 않으신 어머니께 걷는 부담을 많이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주를 제대로 느끼실 수 있는 여행지로 일정을 짰다. 나름 제주 10번의 자신 있는 가이드였다. 오늘의 일정은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를 거쳐 카멜리아힐이다. 같은 폭포를 왜 두 번이나 일정에 넣었으냐 물으면, 두 폭포는 각각 매력이 달라서라고 하겠다. 물론 두 폭포 사이의 거리도 가깝다.


20170915_135228.jpg 천지연 폭포로 가는 길
20170915_144531.jpg 바다로 떨어지는 정방폭포

짙은 숲 길을 걷다 보면 만나는 쭉 뻗은 물줄기가 천지연 폭포다. 초록초록한 느낌을 가득 받을 수 있다. 반면 정방폭포는 거센 파도로 거침없이 떨어지는 폭포다. 검은 바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 검푸른 빛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특히 정방폭포를 마음에 들어하셨다. 태풍의 영향으로 집어삼킬 듯 밀려오는 파도가 장관이라며 파도 소리에 감탄하신다.


사실 풍경도 풍경이지만 어머니께 가장 좋았던 것은 손녀딸과 함께 찍는 예쁜 사진이 아닐까. 괜찮다고 하셔도 자꾸 여기 서보셔라 이쪽 멋지다 여기서 찍으셔라 사진을 권해드리니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잡아보신다. 처음에는 아들이랑 손녀랑만 자꾸 찍어드렸는데 나를 찾으신다. 고마운 며느리랑도 찍어야겠다고 하시며. 무뚝뚝하고 표현이 많지 않으신 어머니라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인데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을 드러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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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좋아하셔서 화초를 많이 키우시는 어머니. 시댁에 가면 한 겨울에도 꽃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어머니의 취향을 적극 반영한 곳이 카멜리아힐이다. 어머니와 함께 가기 위해 숙소에서 제법 쉽게 올 수 있음에도 하이디랑 가지 않고 아껴두웠던 곳이다. 하지만 살짝 판단 미스. 잘 가꿔져서 좋다고는 하셨는데 그냥 자연 그대로인 관광지가 어머니께는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신기하다. 바닷가 근처에 있을 때는 미친 듯이 바람이 불었는데 중산간 쪽으로 들어서니 바람이 잠잠하다. 카멜리아힐에서도 우리가 태풍 영향권에 있음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조금 흐릴 뿐 다른 것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관광객들도 많고. 비오기 전에 둘러봐야 한다며 조금 빠르게 움직인 일정. 피곤하시다는 어머니가 쉬실 수 있도록 숙소로 이동했다. 애월에 있는 숙소. 해안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바람은 거세진다. 태풍 어디 안 갔소 존재를 과시한다.


20170915_144526.jpg 태풍 속 바다, 정방폭포 앞

제주에 왔으면 회를 먹어야지! 애초 계획은 횟집에서 저녁 식사였다. 바람이 점점 더 강도를 높여가고 빗방울도 떨어지고, 어머니도 피곤하시다기에 애월항에서 회를 떠 와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태풍 때문에 손님도 적다며 참돔을 싸게 주시는 아저씨 덕분에 편하게 맛있게 배부르게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태풍 때문에 여행을 망칠 줄 알았는데 태풍 덕을 봤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날씨는 계획에서 벗어난 일을 만들어내고, 우연히 마주하는 상황들이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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