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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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 근처에 갈 일이 생겨서 시어머니랑 밥을 먹기로 했다. 우리 시어머니는 그 나이대에 보기 드문 양식파이시다. 치즈가 들어간 음식을 특히 좋아하셔서 피자나 치즈케이크를 무척 사랑하시는 분이다. 반면에 아버님은 철저한 한식파로 느끼한 음식은 쳐다도 보지 않으신다. 처음 시댁에 인사 갈 때 치즈 타르트를 사 갔는데 너무 맛있다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어머님과 달리 아버님은 먹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으셨다. 최근에 집 근처에서 시부모님과 외식을 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식당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중국집에 갔다. 다행히 식당이 크림짬뽕이라는 어머님 취향 저격의 메뉴를 취급하고 있어 모두가 만족하는 메뉴 선택을 할 수 있었다.
2
오늘은 아버님이 없는 저녁식사이므로 피자를 먹으러 갔다.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라구소스 스파게티, 그리고 네 가지 치즈가 들어있는 피자를 본 시어머니는 무척 흡족해했다. 우리 셋은 밥을 와구와구 먹으면서 서로의 식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시어머니는 닭살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백숙이나 닭볶음탕은 드시지 못한다. 닭을 먹을 수 있으려면 닭의 오돌토돌한 살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백숙을 먹진 못해도 요리는 할 수 있는데, 할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 얼른 뒤집은 뒤 멀리 떨어지곤 한다고 하셨다. 시어머니의 닭살 공포증이 귀엽게 느껴졌다.
3
남편은 한 술 더 떠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오늘 갔던 결혼식에서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접시를 돌려 스테이크를 먼 쪽으로 보낸 뒤 사이드 메뉴를 몸 가까이 놓고 열심히 브로콜리와 파프리카를 먹은 남편이었다. 시어머니는 고기를 잘 안 먹는 아들 때문에 어떻게든 고기를 먹여보려고 노력했던 일화들을 풀어놓았다. 카레나 볶음밥에 작게 썰어서 요리하는 방식으로 고기를 먹였다고 했다. 나는 사춘기 소년들은 다 삼겹살을 삼 인분씩 먹고 그러는 줄 알았다. 평생 뭘 많이 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라고 어머님은 아들에 대해 설명했다.
4
남편은 살면서 한 번도 욕을 한 적이 없는 기인에 가까운 인물이다. 한 살 어린 동생과도 싸운 기억이 없다고 했다. 나는 두 살 많은 오빠와 싸우다 집에서 쫓겨나곤 했는데. 우린 주로 먹을 것을 가지고 다퉜다. 남편에게 먹을 거 가지고 싸운 적 없어요?라고 물어보니 해탈한 자의 대답이 돌아왔다. 동생이 먹겠다고 하면 다 줬어요 먹으라고. 시어머니도 오늘 이런 말을 보탰다. 나는 연년생 아들 둘을 키웠는데 사람들이 저 집엔 애들이 없다고 그랬어. 애들이 조용하고 싸우지도 않아서.
5
남편은 한 번도 부모님에게 혼나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시어머니 말로는 혼낼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단다. 읭 이게 무슨 말이지? 그게 애가 맞는가?? 남편은 어렸을 때도 조용하고 얌전했다고 한다. 애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데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니 세상에 남편 같은 아기도 있었으니 낳아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온 집안 문제를 다 만들어 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이것은 확률이 반반인 게임이다.
6
남편의 음식 선택이 까다로운 덕분에 친정엄마는 요리가 늘었다. 늘었다기보다는 엄마 음식 솜씨의 케파를 확인했다고 해야 하나. 기름지고 느끼한 고기를 먹지 않는 사위를 위해서 엄마는 새로운 고기 요리를 선보였다. 수육을 한 번 더 양념에 졸인 요리였는데 남편은 이런 고기 요리라면 왕창 먹을 수 있겠다고 즐거워했다. 어제는 사위 생일을 맞아 생일상 세트를 전부 요리해서 우리집으로 들고 왔다. 국과 반찬뿐만 아니라 일부러 햅쌀을 사다가 밥까지 해온 완벽한 상이었다. 이번 고기 요리는 장조림이었는데 엄마가 해준 장조림 중 역대급의 장조림이었다. 고기를 찢는데만 한참이 걸렸다고 엄마는 말했다.
7
결혼하고 첫 생일을 맞아서 생일상을 차려주려고 했는데, 이미 냉장고에 엄마표 국과 반찬이 그득하다. 선물은 지난달 여행 중에 마음에 든다는 물건을 사주고 난 뒤다. 내일은 나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남편 생일도 생일답게 챙겨야 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편은 옆에서 라이언 쿠션을 베고 코나와 브라운이 그려진 이불을 덮은 채 자고 있다. 자는 모습이 천사같이 예쁘다. 삼십구 세 수염이 거뭇거뭇하고 눈썹도 시커먼 아저씨가 자는 걸 보고 천사같이 예쁘다고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주관적 해석이 지나치다. 내일은 이 천사님에게 고깔모자를 씌워주고 생일 축하 사진을 찍어주도록 해야겠다. 고깔모자 어디 가서 사야 예쁜 걸 팔려나, 벌써부터 마음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