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듣던 공룡

day-65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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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오빠 친구에게 조립한 라디오를 선물 받았다. 과학 놀이 좋아하는 초딩들이 한 번쯤 하는 것이 라디오 조립이었던 것 같다. 건전지를 넣고 틀면 소리가 났다. 안테나를 뽑아서 올리면 지직거리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주파수는 동그란 버튼을 돌려서 맞췄다. 동그란 버튼의 가장자리에는 촘촘한 홈이 있었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자잘한 홈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섬세하게 조작을 하면 소리가 가장 또렷하게 들리는 곳에 딱 맞출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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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맞춰져 있는 곳이 주파수가 몇 인 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그 라디오를 계속 들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DJ가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어 주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어서 청취자들이 사연을 우편으로 보냈다. 와, 인터넷이 없었다는 말을 쓰다니. 고대의 공룡이 되어 블로깅을 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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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공룡임을 커밍아웃했으니 하는 말인데, 그때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수단도 많지 않았다. 거실에는 CD를 플레이할 수 있는 전축(?)이 있었지만 거실은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방에 있는 카세트 오디오에는 테이프만 틀 수 있었다. 그나마도 테이프를 주로 문방구에서 샀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대로 제작된 물건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짝퉁 같은 믹스테이프에서 가수들은 원래 음정보다 높고 가는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무튼 그런 환경 탓에 라디오는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채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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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외에는 테이프나 CD로만 음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집에 CD로 있던 노래들은 참 많이 들었다. 아빠는 골든 팝 시리즈를 사다 놓았다. 아빠가 직접 트는 건 본 적이 없지만 내가 자주 틀었다. 스탭 바이 스탭 같은 오래된 팝송을 많이 알게 되었다. 엄마는 녹색지대 CD를 샀다. 표지에는 서정적인 헤어스타일의 두 남자의 사진이 있었다. 덕분에 녹색지대 노래가 요즘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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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움을 많이 타는 주제에 귀신 나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많았었다. 온갖 학교 괴담 시리즈를 도서관에서 다 찾아 읽고 토요 미스터리도 꼭꼭 챙겨봤다. 덕분에 자려고 불을 끄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침대 밖으로 팔을 내밀면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 내 손을 귀신이 덥썩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을 스무 살까지 했다. 그 무서움 때문에 잘 때는 항상 라디오를 틀었다. 아침까지 라디오를 켜놓는 탓에 엄마가 항상 뭐라고 했다. 제발 자기 전에 라디오 좀 끄고 자. 하지만 잠들기 직전에 라디오를 끌 정신은 없었다. 라디오는 아침까지 켜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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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스마트 폰에서 라디오가 플레이되기 시작했다. 청취자 사연은 전화로 문자로 그리고 이제 앱으로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영상 통화가 가능한 시절이지만 라디오는 아직도 목소리만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그래서 라디오는 지금 들어도 어쩐지 아련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더 이상 주파수를 손으로 맞추지 않게 되었다. 가끔은 주파수를 이동할 때면 흐려졌다 다시 또렷해지곤 했던 DJ들의 목소리가 그립다. 지직거리다 목소리가 또렷해지는 곳에 정확히 딱 버튼을 멈춰 세우던 손가락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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