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의 점심 커피

day-64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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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하고 나는 몇 초간 뜸을 들였다. 얇은 테이블 너머의 상대방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때의 시선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조급해하는 마음을 이불처럼 개킨다. 개어 놓으면 보이는 바닥에는 각 종 음료의 메뉴가 쓰여있다. 메뉴가 쓰여있는 판은 급할수록 커 보인다. 어디에 무슨 메뉴가 쓰여있는 거지 내 눈동자는 각종 카테고리 그리고 그 hot과 cold 사이의 공간을 무질서하게 훑는다. 그렇게 다급하게 스캐닝을 한 후에 나는 매일 같은 단어를 뱉는다. 따듯한 라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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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알고리즘이다. '나의 커피 선택'이라는 프로그램이라고 친다면 당장 환불해야 할 각이다. 환불하면서 나는 개발자에게 소리칠 것이다. 왜 이놈의 프로그램은 어떤 걸 입력하든 따듯한 라떼라는 결과물을 뱉는 겁니까! 어차피 계속 따듯한 라떼라고만 출력할 거면 뭐하러 이렇게 복잡한 걸 만들어서 비싸게 판 거예요? 당신 사기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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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메이슨이 샀다. 차는 제가 살게요,라고 했는데 카드는 찰스가 내밀었다. 내 카드를 격하게 내밀까 어쩔까 하다가 아침부터 택시를 탄 것이 생각나서 말았다. 우리 팀은 철저한 더치페이로 돌고 있었는데, 요즘 함께 밥 먹는 날이 줄어들어서 간혹 이렇게 누군가 턱을 낸다. 언젠가도 굳이 굳이 내 카드를 밀어 넣어 계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밥을 사겠다, 계산을 하겠다 이런 것도 계산대 앞 눈치게임 한판 승부와도 같다. 찰스의 카드가 긁히고 내 머리는 허공을 그으며 인사한다.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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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자리로 갖다 드릴게요, 라는 말이 들리면 내 시선은 가게 안 테이블로 향한다. 창문이 가까운 자리로 발걸음이 이끌린다. 하지만 해를 쬐고 싶지는 않아서 창문 바로 옆에 앉지는 않는다. 햇살은 내 발끝에서 멈춰있다. 이런 상태가 좋다. 직사광선의 흰 빛이 내 발 언저리까지만 오는 시간. 그리고 나는 그냥 멍하니 흰 빛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시간. 옆에서 동료가 말한다. 이럴 때 그냥 차 마시면서 책 보고 그러다 쓰고 싶은 거 쓰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어라 왜 내 마음의 소리가 귀로 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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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 곧 회의를 시작한다. 이렇게 셋이 모이면 어디서 뭘 하든 회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과거에 기획했던 내용은 뭔지 동료의 긴 발언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그는 들고 온 노트북을 폈다. 들여다 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려 하는데 창밖의 탁 트인 풍경이 자꾸 집중력을 가져간다. 밖은 환하고 투명한 햇살이 도로를 비추고 있다. 도로 위에 드리워진 햇살은 둥둥 떠다니는 흰 물체들이 확인시켜주고 있는데... 그것은 날벌레였다. 작은 하루살이 떼가 도로 위에서 햇살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다면 꽃가루가 흩날리는 것 같은 몽환적인 모습으로 찍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의 궤도는 두둥실이 아니라 왜앵왜앵이었다. 윽 소름 돋아. 나는 다시 시선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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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도 한참을 이야기했다. 내 집중력은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동료의 말은 들렸다가 말았다가 했다. 그래도 네이티브 스피커라는 능력은 참 대단해서 대충 어귀를 맞추어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옷을 이렇게 만든다면 정말 안 만드니 못한 놈이 나올 것이다. 천조각을 이어서 옷을 만들 때에는 천의 시작과 끝을 신중하게 맞춰야 바른 모양의 옷이 나온다. 대충 앞뒤를 엮어 시침질한 것 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도 빨리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와 차로 십 분 거리,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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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천장을 뜨겁게 데워주던 커피는 반쯤 마시자 미지근해졌다. 미지근한 라떼에서는 우유맛이 많이 난다. 커피 우유 같은 라떼를 마저 마시자 거품이 남았다. 거품층은 허풍 같은 맛이다. 부피는 크지만 질감이 허무하다. 맛도 별로 나지 않는다. 굳이 그것까지 마시고 싶지 않다. 라떼 위에 예쁘게 하트 모양으로 올려져 있던 우유 거품은 쭈구렁 하게 섞여 커피잔에 남는다. 거품과 함께 나른한 오후를 거기에 두고 일어났다.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일어나는데 발에 의자가 채인다. 의자야, 너도 나랑 헤어지기 싫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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