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너냐?

서강대 최진석 교수의 강의를 듣고

by Lucie

1.

짧은 흰머리의 피부가 까무잡잡한 남자가 강단에 섰다. 머리가 세도 스포츠형으로 깎으니 젊은 느낌이 들었다. 강의 서두에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철학을 전공한 그 교수는 말했다. 남녀가 서로 마음에 들면 연락도 자주하고 보고 싶어 하고 자주 만나고, 그러다 사귀잖아요. 저는 이렇게 남녀가 사귀기 직전까지가 사랑이라고 봅니다. 그 이후는 사랑이 아니에요. 대부분 40대로 이루어진 청중들이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2.

교수는 사람이 무언가를 좋다 혹은 나쁘다고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호불호의 판단은 그 사람에게 이미 있는 신념, 이미 있는 가치관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가늠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판단을 할 때 사람은 절대 자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의 수행자로 존재한다. 인간을 탁월하게 하는 어떤 '지성'도 들어있지 않다. 호불호를 판단하는 가치관을 만들어낸 이론의 대행자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 판단을 말할 때 '대답한다'라고 말한다. 이미 있는 '지식'을 먹고 그대로 뱉어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누가 더 원래 그대로 뱉느냐, 있는 것을 누가 더 많이 뱉느냐를 기준으로 대답의 잘함과 못함을 판단한다. 이것이 한국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지식과 이론이 머물다 가는 통로로만 존재한다. 이것이 대답의 기능이다.


3.

이 말을 듣는데 어찌나 위로가 되는지. 이번 한주 내내 나는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학창시절 토론대회를 통해서 내가 얻은 건 상이 아니라 다름을 이해하는 법을 터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거 배웠다고 꼴 같지 않게 책에도 한 구절 적어넣었다. 그런데도 내가 '다름'을 만났을 때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다니, 아직도 너무 멀었다고 생각했다. 왜 나는 아직도 나와 다름의 공존을 이렇게도 불편해하는가. 공자는 어떻게 공자가 되었을까, 예수는 어떻게 자기를 잡아 넣을 사람을 알고도 안아주었는가, 별의 별 사람들을 다 떠올리며 도를 닦기 위해 애썼다.


4.

교수는 질문을 할 때만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질문이라는 것은 내면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지구상의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다. 매우 사적이고 매우 고유한 것이다. 그렇게 설명하고 교수는 기가 차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한테 질문받는 거 보셨어요? 기자는 질문하는 게 직업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죠. 한국 사람들이 질문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아니 알고도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더 가관인건요, '이게 맞는 질문인지 모르겠는데요'라고 합니다. 질문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질문도 대답처럼 맞추려고 해요.


5.

회사에서는 궁금해도 참는 게 일인데. 신기한 건 그렇게 번번이 참고 또 참았는데도 아직도 매번 궁금해서 묻고 싶어 진다는 것이다. 교수의 이야기처럼 호기심은 갖고 태어나는 것 같다. 계발한다고 해서 잘 늘어나지도 않고 또 그것의 발현을 억누른다고 해도 슬그머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음표들을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고 참다가 한 두 번 질문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팀에서 또라이가 되어 있었다.


6.

함량은 타고 나는 것입니다. 평생을 외부에서 정해진 기준대로 배우고 그대로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걸 넘어설 수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어를 배운 대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 언어를 기준대로 쓰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죠. 그들은 세계를 관념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어를 디자인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합니다. 예술, Art란 인간의 탁월함을 극도로 끌어올린 것을 의미합니다.


7.

집에서 소설을 읽고 있으면 오빠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얘 또 쓸데없는 거 읽네. 엄마 얘봐 시간 버리고 있어. 소설은 나에게 무척 쓸모가 있는데, 나는 오빠에게 더 뭐라고 설명을 못했다. 그저 무용의 유용이라고 못 들어봤냐, 이 바보야, 하고 넘겼을 뿐. 더 설명하라고 하면 길게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주말 이후로 달라졌다. 교수의 이야기를 듣자, 소설이 왜 나에게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인간 일반에게 왜 가치가 있는지를 나는 10분 이상 설명할 자신이 생겼다.


8.

교수는 물었다. "니가 너냐?" 나는 속으로 반문해 보았다. 나는 나인가? 주말 동안 나에게 물으니 질문이 점점 달라진다. 나는 나로 존재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하고자 하는가? 내가 나로 존재할 때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 것인가?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 격물치지까지도 끝나지 않았는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나의 장르를 개척하고 싶은가? 가난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대도 예술가로 살면 행복할 것인가? 니체도 다 못 읽었는데 미셸 푸코를 읽을 것인가? 그런거 저런거 다 읽으면서 살 거면 결혼이고 육아고 전부 포기하면 어떨까? 근데 이런거 다 지적 허영에 불과한 거 아닐까? 깜냥도 안되는데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거 아닌가? 어차피 잠깐 살다 죽는 건데 왜 이렇게 열심히 고민해서 사나? 결국 나는 내일 아침에 왜 일찍 자지 않았나 후회하겠지? 아, 오늘 일요일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