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나에게 남기는 것들

day-83

by Lucie

1

지금 쓰는 맥북은 오 년 전에 산 것이다. 비싼 물건을 잘 사지 않는 나에게 맥북 구매는 큰 지출이었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물건은 카메라였는데 맥북은 그것을 단박에 제끼고 내 소지품 중 가장 비싼 물건이 되었다. 투명필름을 사서 노트북에 잘 붙인 뒤, 그 위에 플라스틱 케이스를 끼웠다. 키보드 덮개를 씌우고 노트북과 같은 색상인 트랙패드 보호대도 붙였다. 최근 다 닳아버린 케이스와 키보드 덮개를 벗겼더니 다시 새 노트북이 나왔다. 오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상태가 좋은 노트북이다. 맥북 디자인도 리뉴얼되긴 했지만 크게 변하지 않아서 오 년 전 맥북은 그다지 올드패션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2

시간의 흐름이 무색한 맥북과 달리 오 년 사이 나는 많이 변했다. 지난주 학교에서 재학생과 같이 했던 토론을 듣고 사람들은 한결 같이 말했다. 와 너 전투력 다 어디 갔어? 사람들이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았다. 반대 토론자의 주장 뒤에는 득달같이 내 옆자리 발언자가 대답을 이었다. 나는 타고난 수다쟁이다. 말할 틈새를 내가 놓치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런데 어이없이 번번이 발언 기회가 넘어갔다. 또 예전처럼 날 선 표현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전에는 반대편 토론자를 발라버릴 수 있는 말들이 머릿속에 줄줄이 떠올랐는데, 이제는 할 말이 딱히 많지 않아서 발언 기회를 넘기기도 했다.


3

변화가 비단 말하는 스타일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오 년 전 건강검진 기록과 지금 기록을 비교하면 두 배는 될 것이다. 작년부터 건강검진이 연 1회로 끝나지 않고 있다. 나는 서류를 받아서 다시 대학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6개월 뒤에 다시 와야 한다고 했다. 6개월마다 병원에 가서 다시 반년 뒤의 예약 날짜를 핸드폰에 입력하는 일. 그런 것을 하면서 나는 새삼 생명의 기한을 느낀다. 이렇게 몸을 쓰다 더 이상 못 쓰게 되면 끝나는 것이구나.


4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또한 적응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알게 되고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에 영 불편하던 결혼반지는 이제 없으면 허전하다. 1단계 스피드로도 똑바로 박지 못해서 진땀 빼던 재봉은 이제 2단 스피드로도 손쉽게 박는다. 지금은 생소한 세상 모든 일들 중에 어떤 것이라도, 일정 기간 해보면 익숙한 일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장담할 수 있다. 또한 무척 익숙한 일도 일정 기간 하지 않으면 생소한 것이 된다. 그것이 시간이 사람에게 주는 재미이자 의미인 것 같다.


5

오 년 전 맥북이 새것 같아서 좋은 것처럼, 변하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다. 싸이월드에 허세 작렬하던 일기는 페이스북으로 옮겨왔다. 그것은 친구가 하는 글쓰기 수업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나는 몇 년간 그 방식으로 일기를 써오고 있다. 변하지 않는 일기 쓰기는 나를 이만큼이나마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반대로 변해서 좋은 것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탐지하는데 급급하던 레이더가 이제 나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다른 사람 성공에 더 깊이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더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 모든 것들이 나의 행복과는 별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행복해지는 방식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남들이 추구하는 것도 쉽게 버릴 수 있게 되었다.


6

앞으로의 시간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줄지 잘 모른다. 또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도 알 수 없고. 그래도 확실한 것은 내가 정한 방향이 있으니 그렇게 가게 될 거라는 것. 하지만 엄마가 뭐든지 네 맘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게 바로 자만이라고. 그럼 자만하지 말고 그 방향으로 갈 거지만 언제든지 좌초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면 그만이지. 좌초하면 또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모든 인생은 끝나고, 인간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그 시간을 보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인간동물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