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도 잘 안써지는 날의 일기

day-93

by Lucie

1

오늘따라 하얗게 빈 화면을 띄워놓고 뭘 쓸지 생각하는 시간이 길다. 일이 아닌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회사에 관련되지 않은 다른 무언가를 쓰려니 소재가 딱히 없다. 회사를 빼고 난 나머지 이야기가 이렇게 없나. 찻잎이 든 티백을 뜨거운 물에 넣었는데, 마시려고 티백을 꺼내보니 그 안에 아무것도 없어 황당한 느낌이다. 왜 나는 별달리 열심히 일하지 않는데도 회사에서 진을 다 빼고 집에 돌아오는 것일까.


2

오늘은 다른 팀 세미나를 도와드리고, 어영부영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해야 할 일이 없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할 일은 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뭘 할지 계획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일을 하지 않고 어영부영 있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리더는 이미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보고한 상태다. 그 계획은 내가 계획한 바와는 좀 다르다. 그럼 나는 결정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해 나갈지, 아니면 그가 시키는 대로 해볼지. 이도 저도 안 하고 하루를 보냈다. 그런 말이 생각났다. 이끌던가, 따르던가 아님 비키던가. 아무것도 안 하고 골칫덩이네.


3

오래간만에 평소 알고 지내던 동료와 점심을 먹었다. 그 사이 그는 조직도 옮겼고, 새로운 공부도 시작했다고 한다. 바쁘지만 아침을 해먹기 위해 일요일에는 꼭 마트에 가서 직접 장을 본다고 했다. 나는 앱에서 장보기로 시키면 집까지 배송이 와서 편리하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직접 보면서 물건 고르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고 했다. 나는 의외로 화장실 청소가 좋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성취감 못 느끼는 사람들이 화장실 청소하면서 보상받고 그러던데. 아 완전 정곡으로 찔린 느낌. 그래 그게 바로 나다, 화장실 청소가 날 구원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회사로 돌아왔다.


4

최근 친한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친구는 퇴사 사유에 자기계발을 위한 휴식을 한다고 적었다. 그 사직서를 본 상사들이 왜 자신은 자기를 위해 1년을 못 쉬어봤을까,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라고 친구는 말했다.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겠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덧붙였다. 너라는 친구가 내 삶의 든든함과 재미의 일부를 차지한다고. 이렇게 영혼의 미로에 갇혀서 매일 머릿속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그래도 누군가에게 든든함이고 재미라니, 아직은 다행이다 싶다.


5

어제는 오래간만에 퇴사 면담을 했다. 보통은 퇴사 면담을 하는 사람들이 정해져 있어서 나는 면담을 할 일이 없다. 그런데 누군가 퇴사 면담을 나와 하고 싶다고 요청을 한 것이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처음 입사할 때 오리엔테이션을 해준 인사 담당자가 나라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와 한 시간 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간의 감정이 어땠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다음 회사에서는 어떤 생활을 기대하는지. 퇴사 면담인지 수다인지 모를 티타임이었다.


6

새삼 나는 이런 것을 좋아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했었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 이런 성향 때문에 면접관이 나에게 이상하다는 듯 되묻기도 했었다. 왜 영업으로 지원하지 않고 인사팀에 지원하는 건가요? 그때는 다른 대답을 했지만, 지금이라면 사실대로 말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물건을 팔고 싶은 것이 아니라 도와주고 싶은 거거든요. 저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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