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 나의 주변을 스친 사람들

by Lucie

1.
오래간만에 술병이 아닌 진짜 병이 났다. 계속 토하는 바람에 불금에 일찍 집에 왔다. 거실에 드러누워서 TV를 보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 TV 옆에 있는 어항이 문제인 것 같았다. 장식장 위에 어항 냄새를 소파 위에서 맡을 수 있다니, 나는 냄새 맡는 초능력자인가... 덕분에 그냥 방에 들어가서 일찍 잤다.


2.
추워진 날씨 탓인지 집 앞 물놀이터가 한산했다. 물놀이터를 가로질러 지하철 역으로 가는데 내 옆을 지나가던 어린 여자아이가 새된 소리로 웃었다. 친구의 발 모양이 물자국으로 찍혔는데 그걸 보고 너 발자국 봐, 하면서 엄청 높은 소리로 웃고 있었다. 저게 그렇게 우스운가.


3.
지난 주말 메이슨이 한 말이 떠올랐다. 술을 마시던 지인이 소주잔 가득 술을 따라 찰랑찰랑한 상태로 만들고 한 방울씩 똑똑 떨어뜨리면서 그랬다고 한다. 이런 상태로 있어야 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넘쳐 흐르는 그런 상태. 나는 너무 메말랐고 저 아이는 찰랑찰랑한 상태라서 그런 건가. 나도 찰랑찰랑해지고 싶다.


4.
나를 한 걸음 앞질러 에스컬레이터를 탄 덩치 큰 아가씨는 걸음이 느렸다. 씻고 바로 나온 듯 머리카락이 아직 가닥가닥 뭉쳐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지하철은 1분 뒤에 떠나는데... 나는 아가씨를 제치고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갔다. 아가씨 덩치가 있어서 약간 몸이 스쳤다. 그렇게 서둘러 가고 있는데 그 아가씨가 갑자기 뛰기 시작하더니 나를 어깨로 퍽, 치고 지나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굽이 높은 신발 때문에 빨리 걷지 못하고 다시 내 뒤로 처졌다. 내가 타자마자 지하철 문이 닫혔는데, 탔을까 못 탔을까.


5.
열차에 앉아서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가방 윗부분을 들춰서 이어폰을 꺼내는데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가방이 텅 비었네요. 말할 때 벌어진 입안으로 잇몸이 보였다. 이가 몇 개 없었다. 더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대충 대답하고 이어폰을 끼는 내게 아주머니는 다시 말을 걸었다. 냄새가 좋네요. 저한테는 냄새 나죠? 그러고 보니 약간 한약 냄새 같은 것이 나는가도 싶었지만, 그냥 짧게 아뇨, 하고 대화를 끝냈다.


6.
다음 역에서는 녹색 원피스를 입은 아주머니가 탔다. 말이 아주머니지 할머니에 가까웠는데 패션이 화려했다. 그녀는 상추색 원피스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원피스와 같은 색의 이파리가 달린 꽃 몇 송이를 들고 있었다. 가슴에 달린 브로치가 마치 그 꽃의 이파리를 겹쳐 만든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식물 콘셉트의 퍼레이드 중인 사람처럼 보였다. 원피스도 녹색 원단이 아니라 시금치나 상추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머니는 지하철을 타기 전 사람들에게 지하철의 방향을 물었다. 내 옆자리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이거 청량리 지나서요 용산을 거쳐가는 문산행 열차예요. 어라 이 사람 생각보다 정신이 또렷하네.


7.
그 다음 역부터는 승객이 많았다. 앉을 자리가 없자 내 옆자리 아주머니는 늙은 사람이 없는데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객실의 끝에서 예수를 믿으면, 하고 말을 시작했다. 사람이 많이 타면 일어나려고 기다리고 계신 분이었구나. 사람이 많을수록 눈에 불 켜고 앉을 자리를 찾기 마련인데,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의 목적도 서로 많이 다르다. 누군가에겐 교통수단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일터이자 선교의 장이기도 한 것이다.


8.
내가 어느 날 지하철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시선을 보낼까. 어떤 사람은 조용히 하라고 화를 내기도 하겠지. 이가 몇 개 없는 그 아주머니는 말투가 너무 멀쩡해서 설교를 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을 테스트를 해보는 것 같기도 했다. 눈동자 안에 반짝이는 빛이 있는 아주머니였는데 어쩐지 친절하게 대해 드리면 펑, 하고 요정으로 변해서 내 소원이라도 들어줄 것만 같았다. 너같이 편견없는 사람은 처음이구나, 착한 아이니까 소원을 들어줄게, 이런 거.


9.
목적지는 회기역이었는데, 회기역 도착하기 직전에 열차가 갑자기 멈췄다. 갑자기 극심한 공포감이 찾아왔다. 생각해보니 오늘 가방을 바꿔가지고 오는 바람에 안정제도 물병도 없었다. 갑자기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해서 대화 상대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그 순간 열차가 다시 출발해서 공포감이 사라졌다. 안정이 찾아오자 전화기를 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10.
집을 나설 때 엄마가 보약 먹을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 좀 해보라고 했는데. 내가 엄마에게서 떨어져나온 분신이라 그런지, 엄마는 내 상태를 잘 아는 것 같다. 기승전, 엄마 말을 잘 듣자, 로 끝내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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