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죽을 테니 산동안 적당히 마음대로

D-20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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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책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온다. 죽는 순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라고. 바로 자신의 손을 붙잡아줄 따듯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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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본 뒤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 이유는 딱 한 가지가 아닐까. 죽는 순간 내 손을 붙잡아줄 단 한 명을 만들기 위해. 그 한 명이 자식이 될지, 배우자가 될지, 고용한 간병인이 될지, 제자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한 명을 위해 사람들은 이토록 열심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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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초등학생이 옥상에서 던진 벽돌에 맞아 아주머니가 숨진 사고가 있었다. 최근에도 크레인이 쓰러져 근처를 지나던 버스가 맞았는데, 그 버스 안에 있던 승객 중 한 명이 사망했다.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을 급속도로 치고 지나간 차가 있었는데 그때 부산에 휴가를 갔던 모자가 사망했다. 이런 황망한 사건들을 보면 죽고 사는 건 역시 나의 의지가 아닌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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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는 동안의 시간을 컨트롤하는 것뿐이다. 시간제한이 있는 삶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많은 것이 달라 보인다. 처음 공황장애로 기절했을 때는 이승과 작별하는 줄 알았다. 덕분에 기절을 계기로 사고방식이 달라졌다. 가장 달라진 것은 돈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전에는 무조건 저축을 해야 좋은 건 줄 알았다. 저축을 많이 하고 싶었기 때문에 돈을 가급적 쓰지 않았다. 멀리 여행 가고 싶었지만 아시아의 가까운 나라로만 갔다. 비행기 값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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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도 이승과 작별한다고 생각한 순간 통장에 있는 돈이 생각이 났다. 써보지도 못하고 모으기만 하다 죽다니! 공황장애 진단 이후로는 필요할 때는 택시도 타고, 엄마 용돈도 잘 드리고, 멀리 여행도 다닌다. 워라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머라벨도 있는 것 같다. 머니 앤 라이프 밸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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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 이후로는 흉터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남았다. 죽음이 약간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게 얼마나 정신건강에 해로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유용한 면이 많다. 살다 보면 영원히 살 것 같은 관점으로 현재를 소비하게 된다. 엄마한테 대충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사소한 것에도 불평하고. 죽음이라는 렌즈를 끼우면 시력이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엄마가 아침에 만들어주는 토마토 주스를 먹을 때는 항상 감탄을 한다. 엄마가 없으면 절대 먹을 수 없는 퀄리티의 음식이다. 미래에 유능해지는 것보다는 현재 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 죽은 뒤 위인전에 나오게 되더라도 행복할 나는 이미 소멸했다. 사소한 거에 불평할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본부장님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부서를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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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남편에게 종종 죽는 이야기를 한다. 제가 요정님보다 나이도 어리고, 여자가 확률적으로 남자보다 오래 산다는데, 요정님이 저보다 먼저 죽으면 어떡해요? 이렇게 징징거리면 남편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럼 나는 정색을 하면서 요정님이 저보다 더 오래 사실 거예요?라고 반문한다. 남편은 항상 같은 날 같이 죽을 거지요, 하고 웃는다. 그건 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아직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통제할 수 없다. 그냥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내키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위안 삼는다. 살아있는 동안만 나로서 나를 결정할 수 있는 거니까. 나의 시한부를 내 의지대로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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