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부는 날의 일기

비밀방명록을 줄여서 비방이라고도 불렀었다.

by Lucie

1
최근 며칠 싸이월드 방명록 이야기가 화두에 자주 올랐다. 비밀 방명록이 생긴 어느 시점부터 거기에 썸이 기록되었기 때문이지. 와이프 몰래 다운로드를 받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거 따윈 지구상에 없는 것이 평화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그걸 다시 읽어보고 나에게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


2
음.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어.
여기 와서
한국에 무척 가고 싶었고
무언가 무척 슬펐지만.

요샌 그저 그래.


그저.
일하러 갈 시간에 일 가고
남은 시간 그냥 보내면서-


니가 해준 조언이 떠올라서
날 위한 일기를 한 번 썼었다.
노트에다가 또박또박.
괜찮더라 내가 봐야 할 앞을 봤어
슬픔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앞이랄까.


넌 잘 지내?ㅎ


3
2008년에 친구에게 남긴 방명록이었다. 나는 저런 말을 쓰는 애였군. 새삼스러운 과거를 뒤적이면서 7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또 달랐구나, 싶었다. 당시 나는 대학시절 오랫동안 만난 연인과 헤어진 참이었다.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나는 저날 이후로 노트에 또박또박 일기를 썼다. 그 일기는 문장과 문장이 끈질기게 이어진 글이었다. 앞 문장의 물음에 뒷문장이 답하고 그런 생각의 고리가 촘촘하게 연결된 일기였다. 그렇게 나는 이유 없이 슬픔으로 곤두박질치는 정서를 이성적으로 극복해 내곤 했다. 나는 왜 슬픈가, 로 시작하여 더 이상 슬플 필요도, 슬퍼서 덕 볼 것도 없다는 결론으로 끝나는 일기를 통해서.


4
작위적인 문장들은 지금보다 더 많이 쓴 것 같다. 그런 말들을 꺼내서 늘어놓는 것이 오선지에 그린 음표마냥, 아름답게 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작위적인 말투가 주는 정서를 좋아했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서는 문체도 정서도 좀 변했다. 나는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정서도 뭔가 우유에 담근 유산균같이 그것의 본질도 형태를 바꾸고, 그걸 둘러싼 환경의 질감도 바꿔나가는 듯ㅋㅋ'


5
서둘러 퇴근을 하고 첫회사 입사동기들을 만났다. 우리는 강용석의 홍콩 그녀를 찾아보고 - 이로써 홍콩은 마녀사냥의 19금 이미지와 더불어 불륜불륜한 이미지까지 얻게 되었군 - 건강검진 이야기는 왜인지 전립선 초음파 검사(?)라는 여자들은 알 수 없는 이야기로 번졌고, 차 마시러 간 카페 화장실의 변기고장으로 물을 내릴 수 없는 기괴한 상황까지 겹쳐 오늘도 우리끼리 쓰는 많은 유행어를 제조해 낸 뒤에, 헤어졌다.


6
오늘은 밤바람이 매서웠다. 나는 헐렁한 맨투맨 안으로 들어오는 낮은 온도의 공기를 옆구리로 느끼면서 길을 걸었다. 찬 바람을 쐬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일 죽어도 억울하지 않은 오늘이었나. 3년 전 지하철을 못 타서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려나. 무엇이든 자유로운 나를 방해하는 것들은 제거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또 다시 하나 둘 늘려온 것은 아닐지. 찬 바람은 어쩐지 사람을 미련 없게 만들고, 욕심 없게 만들고, 허전하게 만들고, 이윽고 그 사람만을 길거리에 덩그러니 남겨 놓는다. 오늘도 역시 나는 떠나고 싶다. 나는 가장 떠나기 좋은 시점을 타진하기 위해 날짜를 갈고 닦는다.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싶은지도 모호한 상태로, 그냥 날짜만을 갈고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