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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씻으러 가는 길에 꺼져있는 보일러를 봤다. 나는 동선에서 팔만 뻗으면 켤 수 있는 보일러를 그냥 지나친다. 그걸 켜고 따듯한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나와서 잊지 않고 보일러를 꺼야 하는, 그 여러 가지 퀘스트를 찍느니 그냥 차가운 물로 세수하는 게 낫다. 조금만 참으면 많은 귀찮은 일들을 없애버릴 수 있다. 근데 이렇게 써놓고 나니 고작 그게 귀찮아서 찬물로 씻는 내 성격도 어지간히 유별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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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이 핼러윈인데, 루시 뭐할 거예요? 누가 이렇게 물어와서 아 이번 주가 핼러윈이구나...몰랐어요. 하고 대답했다. 핼러윈에 호박전이나 부쳐먹을 기세. 그나저나 핼러윈이라고 들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걸까. 우리나라에는 유령코스프레를 하고 옆집 문을 두드려 사탕을 달라고 하는 애기들이 없을 텐데. 그래도 뭔가 신나는 일을 계획하게 만드는 계기들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같다. 매일매일 말도 안 되는 계획들을 짜면서 신나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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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는 건 내가 요즘 의욕이 없어서 그런 듯하다. 일도 꾸역꾸역 하고 있고, 꾸역꾸역 하는 일 외에 다른 건 별로 하고 싶지가 않다. 최근 동갑내기들끼리 간 엠티도 간다고 내가 스스로 약속했기 때문에 언행일치를 위해서 참석했다. 12월에 제주도에 가자는 친구들의 부름에도 가장 마지막으로 비행기표를 샀다. 이 의욕고갈 상태가 아마도 12월엔 끝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옛날 옛적에 끊어놓은 오키나와행 비행기표가 다음 주에 나에게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예고하고 있다. 비행기 탑승이 다소 공포스러운 가운데 아마도 나하에 있는 숙소에서 구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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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사람들에게도 무척 히스테릭하게 굴고 있다. 오늘은 변호사 출신 팀원의 상법 스터디에서도 여지없이 중간에 돌을 던졌다. 470조쯤을 보고 있을 무렵에, 이거 500조가 넘는데 이렇게 하나씩 다 보실 거예요?라고 물어봤다. 다하고 나서 보니 처음부터 중요한 부분이 400번대에 몰려있어서 그 정도 보고 끝내시려고 했던 듯하다. 물어보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알아서 잘 끝날텐데, 이 급한 성질머리는 언제 고칠 수 있을지. 게다가 내가 여느 가을 같지 않게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는 게 29.9세의 영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아 이런 게 몇 년만 지나면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불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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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혼 안 하고 늙으려면 성품이라도 온화하게 고쳐야 할 것 같다. 노처녀인 건 괜찮지만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리며 사는 사람이라니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다. 나는 그나마 내 미래를 결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열린 결말로 그리고 있는데, 그래도 노처녀라는 말에 대한 스트레스를 대비해야 한다는 걸 느낀다. 다만 나는 내 결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인생을 살 거니까. 나의 결정으로 인한 어떤 스트레스가 있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하아, 토요일 밤에 언젠가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린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을 하고 있다니, 엄마가 본다면 우리 딸 또 쓸데없는 걱정을 시작했네, 라고 하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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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여행을 간다고 하니 후배 하나가 '언니 그럼 여행일기 써주시는 거예요?'하고 물어왔다. 누군가 내 일기를 읽어주고 그 글을 기다려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일기가 써진다면 1일 1일기를 작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