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여행 마무리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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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증이 장롱면허인 탓에 나는 버스투어를 예약했다. 아침에 버스를 타러 가니 분홍톤의 유니폼과 챙이 동그란 분홍 모자를 쓴 여행가이드가 버스 앞에서 나를 맞아주었다. 어느 한국 가이드가 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저런 유니폼을 차려입을까. 매우 일본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는 40대 정도의 키가 작고 통통한 체격의 여자였다. 분홍 유니폼과 모자, 그리고 몸매 때문에 해리포터의 돌로렌스 선생인가, 그 사람을 연상시켰다. 그 분홍마니아인 선생은 해리포터의 손등에 글씨를 새겨넣는 벌을 주었지만 가이드는 영어를 못할 뿐 상냥했다. 나키진 성터같은 경사있는 산길이 일정에 있었는데도 앝은 굽이 있는 힐을 신고 싹싹하게 안내를 했다. 그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가이드로서의 사명과 자부심이 느껴진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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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여기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모노레일의 바닥을 쓸고 있던 직원도 군청색 모자와 군청색 바지를 흰 셔츠와 매치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밤 10시에 손전등을 들고 슈리성을 순찰하던 직원도 칼 같은 유니폼을 입고 - 밤이라 색은 기억이 안 나지만 - 나에게 곰방와, 하고 인사를 건넸었다. 유니폼은 사람의 개성을 없애고 공장의 부품처럼 규격화하는 느낌이 있기도 하지만 여러 순작용도 있는 것 같다. 유니폼을 입으면서 그 직업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되어 동기부여를 해준다거나, 혹은 그 직업이 가지는 권위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뭘 입을지 고민하지 않고 빨아입기만 하면 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으로 여겨진다. 아무 생각없이 아무거나 주워 입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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츄라우미에 갔을 때는 엄마 생각이 났다. 최근 늘어난 구피들 때문에 큰 어항을 사서 꾸미고는 매일매일 즐거워하던 엄마였다. 화장대에 화장품을 다 내려놓고 엄마는 어항을 거기에 올려놓았다. 큰 어항 때문에 화장대 거울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러자 엄마는 작은 손거울을 들고 화장을 했는데, 구피를 보면서 화장을 하니까 너무 행복하네, 하고 이야기했다. 화장하는 엄마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 무튼 물고기가 가득한 수족관을 보니 엄마 생각이 났다. 여행 갈 때마다 엄마와 함께 왔으면 무척 좋아하셨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정작 여행은 매번 혼자 떠나고 있다. 다음엔 정말 엄마랑 같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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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키소바와 고오야찬푸르, 지마미토후와 타코라이스를 먹어보라는 E언니의 댓글도 자꾸 생각이 났다. 결국 못 먹은 지마미토후는 공항에서 사서 한 손에 들었다. 일본은 오사카도 가고 오키나와도 가면서 정작 도쿄는 가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첫 일본 여행을 함께 했던 S언니 생각도 많이 났다. 언니와 오사카에서 산토리며 아사히 맥주들을 흡입했던 추억 때문에 편의점에 갈 때마다 언니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그때 S언니가 입욕제도 가져와서 마지막 날에 함께 족욕을 하기도 했었다. 최근에 언니 집에 놀러 갔을 때도 일본에서 사온 발열안대를 하고 자라고 챙겨주기도 했지. 그날도 어김없이 언니 집 세면대에는 일본 퍼펙트휩이 놓여있었다. 일본에 와서야 S언니와의 추억이 참 많았다는 걸 새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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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풍경도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역시 사람의 인생은 사람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다. 좋은 걸 보면 그걸 좋아하는 사람 생각이 나고 어떤 사연 있는 물건이나 장소에 가면 관련된 사람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좋고, 선한 것일수록 사는 것은 아름답다. 살면서 빨래세제 한 통도 당첨된 적이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언제나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운도 좋고 인생도 잘 풀려왔고 앞으로도 잘 될 것 같고, 부족한 것이 없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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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회의 때도 툭하면 사람들을 쏘아 붙이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쉽게 공격했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매일 밤 생각하고도 다음날 회사를 가면 또 똑같이 굴었다. 그게 좀 걱정이었는데 잠깐 와서 쉬니까 약간 마음에 매인 허리띠를 한두 칸 늘려서 맨듯한 느낌이 든다. 밤 10시에 도착한 슈리성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불은 아주 환하게 밝혀져 있어서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아무도 없는 성 근처 정자에 앉아서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고 들었다. 멀리서 인기척이 났다. 다른 관광객이 왔나 싶어서 음악을 줄였다. 짤깍짤깍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유니폼을 차려입은 성 관리인이었다. 뭐가 부딪혀서 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말 발굽 소리처럼 걸을 때마다 났다. 이 시간에 여기 있으면 안 되나, 나를 쫓아내려나, 가까이 올 때까지 마음을 졸였다. 가까이 오자 관리인은 나를 보고 곰방와, 하고 말했다. 곰방와, 하고 방금 들은 인사를 돌려주었다. 멍청하게 야경을 보는 동안 짤깍짤깍 소리가 멀어졌다. 좋은 저녁이야, 관광을 왔나 보구나, 잘 쉬고 너무 늦지 않게 가렴, 그리고 오키나와에 또 오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낯선 관광객에게 마치 매일 거기 있는 사람을 본다는 듯 눈길도 안 주고 풀밭과 돌멩이들을 열심히 보면서 와선, 정말 매일 보는 사람에게 하듯 무심히 인사하고 가는 관리인이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 이상한 기시감은 뭐지. 아마도 나는 언젠가 오키나와에 또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