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2
1
분명히 집에 오는 길에 쓰려던 글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취해 있으니까, 술 때문이라고 치부해 본다.
2
오늘은 꽤 우울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잠깐 푸념하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우울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우울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안다. 우울증의 전조는 무기력증이다. 그는 무엇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춘기의 소년처럼 사소한 멘트에도 금방 뾰족한 가시가 돋았다. 그냥 지금은 아무 말도 소용없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하고 싶은 말을 내려놓았다.
3
자리 근처에 흰 봉투에 들은 빵 꾸러미가 있었다. 마침 심심한 참이라 일단 손가락으로 한 점 떼어 입에 넣었다. 브라우니였는데 빵이라기보다는 초코덩이 같았다. 너무 달아서 입에 넣자마자 윽, 달아!라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달지만 손에 집어 든 덩어리를 일단 다 먹었다. 먹고 나서 한참 뒤에서야 이거 누가 사온 거냐고 물어봤다. A는 어디 가면 같이 먹을 빵도 사 오고 하는데 B는 왜 안 사오시냐는 팀원의 농담 섞인 타박에 B가 사 온 것이라고 했다. 빵은 하나같이 모두 달아서 다 먹지 못하고 남았다. 남은 빵들은 모두 화려한 비주얼을 뽐내고 있었다.
4
취해서 그런가. 괜히 의미 부여하게 된다. B의 마음에 찜찜하게 남은 앙금 같은 맛이 아닐까. 그는 그래서 이런 빵을 우리에게 사다 준 것이 아닐까. 하나하나 임팩트가 있는 화려한 빵. 남은 빵은 너무나 멀쩡해서 버리기가 아까웠다. 건너 편 사람이 말했다. 그냥 두면 내일 누군가 먹지 않을까요. 그렇게 빵들이 테이블 위에 남았다. 내일은 과연 누군가 그걸 먹어치울까. 보통 사무실에 먹다 말고 남겨진 음식의 운명은 한결같은데. 계륵같이 굴러다니다 버려지지 않을까. 끝끝내 그걸 버리는 손은 아까움에 파르르 떨릴 테지.
5
오늘의 나의 말에 대해서 돌아본다. 기쁘고 즐거운 말, 불평불만의 말. 오 대 오의 비율인 것 같다. 하지만 역시 가까운 동료들에게는 불평을 더 많이 늘어놓은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다. 가깝게 일하는 동료들과 기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눌 수 있도록 신경 써야겠다.
6
오늘도 역시나 예외 없이, 사람에게 입은 상처를 사람에게서 치유받았다. 다 같이 함께 잘 살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퇴사하는 동갑내기 친구 하나를 불러내서 열 명이 술집에 뭉쳐 웃고 떠들었다.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술자리를 뜨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퇴사하는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또 보자고 말했다. 아마도 또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