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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do not panic

프롤로그 - 예고 없는 인생

by Lucie

인생에 예고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쁜 일은 얼마든지 예고 없이 찾아와도 괜찮다. 하지만 불행에 대해서 만큼은 조금의 힌트라도 있으면 어떨까.


여러 해 전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무척 재밌게 봤다. 남녀 주인공의 몸이 바뀌는 독특한 설정의 드라마였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공황장애라는 병을 앓고 있다. 백화점 사장인데 엘리베이터를 못 타서 꼭대기 층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근을 한다. 하지만 영혼이 바뀌면서 여자 주인공의 영혼이 남자 몸에 들어가고, 그 후 엘리베이터를 잘 타게 된다. 그러다 남자가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갇힌 상태에서 남녀의 바뀐 영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면서 남자 주인공이 쓰러지는 급박한 상황이 생긴다.


못에 핏대가 선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던 예고편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남자 주인공이 죽는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 다음 편 드라마도 본방 사수할 것을 다짐했다. 그 드라마가 끝나고 삼 년이 지날 때쯤 나는 드라마 속 남자와 똑같은 병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된다. 공황장애로 엘리베이터에서 쓰러지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걸. 고작해야 기절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여자 주인공도 그렇게 생 난리를 피우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숨을 몰아쉬는 현빈, '안 돼'를 외치던 하지원. 드라마 최고의 고조된 순간이 둘의 얼굴을 교차하며 나오고 있었다. 내 인생의 불행은 그렇게 뚜렷한 스토리를 갖고 있었을까. 돌이켜 보면 그렇지 않다. 월요일이었고, 나는 모든 직장인이 그렇듯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었다. 갑자기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고, 지하철 문이 열리면서 앞으로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가까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다시 일을 했다.


간혹 나는 이 시공간을 여행할 능력이 부족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과거에 나는 건강했고, 즐거웠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대체로 제 삼자가 되어 밖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똑똑해 보이는지, 인기가 많은 사람으로 보이는지, 입은 옷이 유행에 뒤쳐져 있지는 않은지. 점차 내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어느 날 의식을 잃었다. 그날부터 나는 갑자기 나약하고 불안한 사람이 되었다. 왜 나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나 자신에 대해서 그토록 모르고 있었을까.


모두의 인생에 예고편은 없다. 그래도 내 이야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작은 힌트라도 되기를 바라면서 내가 겪은 공황장애 이야기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갑작스러운 우주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더라도, Don't pa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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