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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do not panic

SSRI

미래의 나를 위한 약 복용 기록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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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든 우울증이든 대체로 약은 SSRI를 처방받는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세로토닌은 신경전달물질이라고 하는데, 지식이 얕아서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다. 호르몬은 아니지만, 흔히 행복 호르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의사는 이 약을 먹으면 불안한 전조 증상이 호전될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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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을 먹으면서 알게 된 재밌는 점은 SSRI에도 종류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류마다 효능도, 나타나는 부작용도 조금씩 다르다. 이전에도 약 먹을 때 졸려서 살기 힘들었다는 나의 주장에 의사는 처음엔 약을 5mg 처방해 주었다. 처방받은 약은 에스시탈로프람이었던 것 같다. 5mg은 보통 치료용으로 쓰기엔 적은 용량이다. 아침에 먹는 약이었는데 먹으면 오전부터 몸이 축축 늘어졌다. 보통 흐린 날이면 맑은 날보다 몸이 처지곤 하는데, 딱 그런 느낌. 대신 확실히 평소보다 다르게 이완된 느낌이 있으니 불안 같은 건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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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복용한 뒤 의사는 약을 10mg으로 늘려주었다. 이때부터가 난관이었다. 오전 내내 하품을 멈출 수 없었다. 앉아서도 하품, 회의 가면서도 하품, 커피 마시면서도 하품. 졸음과 함께 무기력함도 엄습하는데, 여기서부터는 대함정인 것이, 약 때문에 무기력한 건지 아니면 일하기가 싫어서 게으름을 피우는 건지 분간이 안되기 시작했다. 나의 게으름을 탓해야 하나, 약을 탓해야 하나. 괜히 내가 약 핑계 대면서 더 게으름 피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면서도 진짜 약 때문일지도 몰라, 하는 갈팡질팡을 하루에 스무 번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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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약 먹는 시간을 자기 전으로 바꿔 봤다. 그랬더니 이번엔 잠이 안 오는 것이었다. 피곤은 한데 잠이 오지 않아서 눈 감고 누워있다가, 핸드폰 보다가를 반복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복용시간을 저녁 7시쯤으로 바꿨는데 그러니까 잠도 조금 잘만하고, 오전에 졸린 것도 덜했다. 그래서 저녁 복용으로 시간을 아예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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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mg을 먹자 회의하다가 한쪽 손이나 발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이 사라진 것 같은 쎄한 느낌에 고개를 내려서 내 손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내 몸이 아니여서 안 움직여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손가락을 움직여보자 의도대로 잘 움직여졌다. 의사는 근육 이완이 많이 되어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잠이 들 때도 의식이 천천히 멀어지는 걸 느낄 수 있던 밤도 며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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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을 먹고 병원을 갔는데 의사가 약을 바꾸자고 했다. 전반적으로 수면의 질이 너무 떨어져서 더 복용하면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 한 달 사이에 나는 이 약을 먹으면서 정말 정말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여러 번 탔다. 한 번은 정말 딱 나만 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는 칸에 탔는데, 아마 약을 안 먹었다면 아예 타지도 못했을 것이다. 약 먹고 있으니 심장이 왈칵, 하고 반응하는 일을 없을 거라고 믿었다. 믿었던 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는 불안 감소 효과는 약간 떨어지지만 덜 졸린 새로운 SSRI를 처방해 주었다. 프록틴 10mg을 먹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확실히 덜 졸려서 이제 조금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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