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병원에서
1
"일반 건강보험으로 해드릴까요? 아니면 보험 적용 안 하고 해 드릴까요?"
접수를 도와주시는 분이 물었다. 보험 적용을 안 하다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돼서 다시 물었다. 기록이 남지 않기를 원하는 경우에 그렇게 해준다고 한다. 왜 그런 작업이 필요한지 몰라서 보험으로 처리해달라고 했다.
2
병원은 거의 오 년만이다. 사실은, 병원에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안 난다. 의사가 전에 치료받을 때 약을 얼마 동안 복용했는지 물었는데, 그것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일회용 포장에 넣어진 알약을 두루마리 휴지인양 둘둘 말릴 정도로 수북하게 받아오곤 했는데. 하지만 그걸 얼마간 먹었는지는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냥 대충 넉 달 정도 먹었다고 둘러댔다. 의사는 보통 치료약은 1년 정도 복용하는 게 일반이라 짧게 먹은 거라고 설명했다. 그럼 혹시 일 년 정도 먹은 거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3
지난 여행에서도 잠깐 불안증세가 나타났고, 종종 갑갑할 때가 있어서 비상용 약을 타기 위해 찾은 병원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치료약을 권했다. 다시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니까 덜컥 겁이 났다. 지난 약 복용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공황장애와 관련된 내 기억들은 이런 식이다. 기억해야 할 것들 중 상당수가 유실되었고, 특별히 나쁜 기억만 띄엄띄엄 보관되어 있다. 힘든 기억들은 상자에 담겨 마구잡이로 뒤섞인 듯, 시간 순으로 뭐가 먼저고 뭐가 나중 인지도 알 수 없다. 상자 위에는 '약 먹고 힘들었던 기억'이라고 쓰여있는데 뭔가 설명하기 위해 막상 그 상자를 열면 나도 알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온다.
4
"약을 먹고 성격이 변한 것처럼 느껴져서 그때 우울함이 느껴졌어요."
"성격이 변한 것처럼 느껴진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늘 졸리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졌어요. 뭘 해도 의욕이 안 생기니까 이전과 제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져서요."
5
의사는 더 이상 치료약을 권하지 않고, 비상약을 처방해 주려고 했다. 문득 아쉬워진 내가 다시 물었다. 치료약을 다시 먹으면 공황장애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의사는 나에게 저절로 되는 건 없을 거라고 했다. 인지치료를 반드시 병행해서 생각의 흐름을 바꿔야 가능하다고 대답해주었다.
6
그 말이 마법처럼 느껴졌다. 공황장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되도록 영화관에 가지 않고, 되도록 금요일 저녁에 강남역에서 약속을 잡지 않고, 되도록 음악 페스티벌에 가지 않고, 되도록 남산 1호 터널을 통과하지 않는 길로 돌아가는 일. 그런 일을 아예 하지 않고 산다는 건 어떤 일상일까.
7
그냥 평생 달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체념한 것도 있었다. 나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안 해봤다가 막상 입 밖으로 그 말을 뱉고 나니 혹시 몰라 다시 약을 먹어보고 싶어 졌다. 다시 치료약을 달라는 내 말을 듣고 의사는 '생각이 바뀌셨네요?' 라고 나의 갈팡질팡한 마음상태를 짚어주었다. 또 며칠은 적응이 안 돼서 방바닥과 한 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놈의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인지 뭔지, 일단 먹어보자.